여정(旅情)

러시아, 북유럽 여행기록 제9일/ 엷은 옥색의 빙하 빛깔, 마치 천상이나 꿈속을 거니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솔고개 2021. 5. 22. 23:54

러시아, 북유럽 여행기록 제9일

                                                            청솔고개

 

   새벽에 일어나서 창을 통해 멀리 가까이 빙원과 설원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백야의 희미한 상태에서 보았지만 새벽 기운의 명징(明澄)함으로 더욱 맑게 씻어진 계곡의 산뜻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는 만년설산과 게이랑에르(Geiranger) 피오르(Fjord) 고지대이어서 풍광이 시시각각 바뀐다. 모처럼 친구 몇몇에게 여기 이번 여행의 감동이 집약된 이 산장에서 보이는 풍경을 담은 사진을 한두 장씩 전했다. 새벽에 한 번 일어나 주변을 산책하지 못한 아쉬움이 내내 남는다.

   06:42에 호텔에서 출발, 난 출발의 아쉬움에 열쇠를 반납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나오다가 반납은 결국 가이드 신세를 진 셈. 떠나오면서도 자꾸 고개를 들어 다시는 올 수 없을 전설 같은 이 산장을 보고 또 본다. 산장 바로 옆의 협곡에는 눈 녹은 물이 만든 폭포 소리가 지축을 흔든다. 주변에 야생 블루베리가 널려 있다고 하는 이야기는 나중에 여행 사이트를 통해서 나중에 알 게 되었다. 또 남는 아쉬움. 여행은 늘 이런 아쉬움의 연속. 너무 큰 욕심인가. 우리는 세계적인 명성의 요정의 길 트롤스티겐(Trollstigen)로드를 달린다. 바로 옆 좌석의 일흔 중반 줄에 드신 것 같은 연로하신 여행객의 기록 태도가 참 돋보인다. 순간의 감성, 감동, 감흥, 감각은 바로 기록으로 남겨 둬야 하는 법. 나도 익히 아는 데 실제 풍광에 필이 꽂히면 그냥 보기만 한다.

   나는 여행의 감동, 연관된 꿈, 해석보다는 즉물적이고 현현하는 색상, 형상에만 매몰되는 듯하다. 반성이 된다. 여행도 좋지만 불안 심리가 깔려서인지 끼 때마다 맘껏 포식하는 것도 여행의 자유라 할까. 그런데 그러면 자꾸 망가지는 듯 한 느낌이 든다. 척추 관을 위해 매일 3번씩 하던 체조도 잊어버리고, 이미 망가져서 열이 뜨뜻하게 나는 노트북에만 쓸데없이 매달리고 문득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번거롭다. 20대부터 꿈꿔오던 작가의 길도 자꾸 멀어지고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가는 길은 이름 모를 호수, 흰 눈을 이고 있는 산들의 파노라마다. 그런데 아내는 벌써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다.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이 길인데,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아득함은 없는지. 어떻게 이런 풍광을 두고 잠이 오는지. 날이 좀 흐리다. 곧 비라도 올 것 같다. 맑은 날은 날대로 실비 내리는 날은 날대로 좋은 곳.

   트롤스티겐. Troll(도깨비)과 Stigen(사다리)의 합성어로 지그재그의 험난한 도로를 따라 산을 넘을 수밖에 없는데, 길 모양이 마치 사다리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길을 간다. 9시쯤 2005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유명한 게이랑에르피오르(Geirangerfjord) 기점에 도착했다. 노르웨이 서부의 작은 관광 마을로, 2005년부터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으로 선정되어 있는 게이랑에르피오르(Geirangerfjord)의 시작이자 끝 부분에 위치한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에 포함되어 있는 일곱 자매 폭포(Seven Sisters Waterfall)가 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건축물은 1842년에 지어진 게이랑에르 교회이다. 이 게이랑에르 마을의 선착장에 올라서 헬레쉴트 가는 유람선을 탔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피요르인 게이랑에르피오르(Geirangerfjord)에서 헬레쉴트(Hellesylt) 가는 구간이다. 날이 흐리더니 비가 온다. 사진과 영상으로는 쾌청하던 이 호수만 보다가 실제 운무 자욱한 세찬 봄비 속의 피오르는 또 다른 얼굴이다. 바로 우리 조상님들, 옛사람들이 뱃놀이하던 풍류를 흉내 내어 본다. 내가 준비해온 소주 한 병을 꺼내서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일행들에게 딱 한 잔씩 나눈다. 앞서 배 위에서는 가져온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가이드 눈치가 보인다. 가이드도 주목하는 것 같아서 괜히 미안해진다. 그러나 먼저 한 잔에 7천 원씩이나 하는 커피 넉 잔을 팔아주었는데 하는 마음으로 버텨본다.

   이 뱃전에서 보이는 풍광을 고등학교 세계지리 수업에서부터 많은 여행기나, 사진과 영상으로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특히 최근 친구들의 여행 사진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북유럽 여행의 트레이드마크인 것이다. 호수도 아닌 것이, 바다도 아닌 것으로 우리를 끌어가는 것은 요정 마스코트인가. 가이드는 지금이 피오르 탐사 최적기라고 한다. 그 동안 눈이 많이 녹지 않아 폭포의 수량이 부족했는데 5월 하순부터 눈 녹은 물이 폭포로, 계곡물로 되어 엄청난 장관을 이룬다는 것이다. 운무에 젖은 협곡은 그대로 신비경, 멀리 보이는 건 만년설인지 폭포줄기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신부의 면사포(面紗布)로 비유되는 일곱 줄기 가닥으로 천상에서 옥황상제(玉皇上帝)가 하얀 비단자락을 하사(下賜)하는 듯 한 일곱 자매(姉妹) 폭포를 비롯하여, 사연이 있고 없고, 이름이 있고 없고 한 숱한 물줄기가 구석구석 내리꽂힌다. 그런데 이 일곱 자매(姉妹) 폭포도 운무에 가리어 희미한 자태만 드러낸다. 낯 선이에게 수줍은 듯 오늘은 속살을 감춘다. 많이 아쉽다. 청명한 햇살 아래 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기도 하다. 프라이아렌(Friaren) 폭포. 그 명칭은 '구혼자(求婚者, Suitor)'라는 뜻의 노르웨이어이다. 게이랑에르 관광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폭포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게이랑에르피오르 남쪽 해안의 가파른 절벽위에서 하나의 물줄기로 125m를 떨어지다가 중간에서 바위에 부딪히며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쏟아진다. 산위의 호수에 의해 형성되며 일 년 내내 물이 흐른다. 맞은편에는 약 300m 높이에서 일곱 갈래로 쏟아지는 일곱 자매폭포와 함께 게이랑에르피오르 유람선 관광의 명소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에 미혼의 일곱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한 청년이 그녀들에게 각각 청혼했지만 일곱 자매는 술에 빠져 있어 모두 거절해 버렸다고 한다. 이에 상심한 청년은 일곱 자매에게 바칠 술병의 모습으로 변해 폭포가 되었다고 한다. 여전히 날이 살짝 흐리어서 안개인지 이슬비인지 뿌연 기운이 뱃전을 적시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정도 정말 정신없이 이 피오르의 절경에 넋을 잃었다. 이 절대적 풍광(風光)을 느리게 가는 유람선 때문에 푸근히 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는 이 여정(旅程)의 흐름이 아쉬워 하나라도 더 보려고 뱃전 곳곳을 똥 마려운 강아지 모양으로 난 왔다 갔다 한다. 한국어 안내 서비스도 들린다. 이런 차분한 관광안내도 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저 멀리 헬레쉴트 마을이 보인다. 헬레쉴트(Hellesylt)는 인구 600명 내외의 작은 마을이다. 저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야 지도에 표기된 달스바나나 온달스네스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나 보다. 동행한 부산 출신 ㅊ사진작가님이 뱃전에서 우리 ㅊ친구내외에게 웨딩 사진 같은 포즈를 취해보라고 한다. 둘이 다정히 눈 맞춤을 하는 모습을 그대로 담는다. 내외는 무척 쑥스러운 듯 한 표정이지만 연출에 잘 따른다. 그래서 즐겁다. 훈훈한 여행의 한 장면이다. 10시 30분, 한 시간 동안의 피요르 호수 유람은 끝났다. 아쉽다. 다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요정의 길답게 입구에 아주 큰 트롤인형이 길가에서 웃고 있다. 요정치고는 무척 마음씨 좋고 시원하게 잘 생긴 요정이다. 코가 유독 크다. 북유럽 최대의 빙하산인 요스테달 산을 관통하는 피얼란드 터널을 지나 세계에서 가장 큰 빙원이 있는 피얼란드로 이동한다. 버스에서 바라본 주변 경치는 5월 하순, 비가 계속 내린다. 산은 만년설을 이고 있고 좁은 계곡에선 빙하수가 콸콸 쏟아진다. 땅엔 아직 초봄처럼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빙원을 자랑하며 푸른 빙하라고도 불리는 요스테달 빙원(Jostedalsbreen)의 뵈이야 빙하를 찾았다. 엷은 옥색의 빙하 빛깔. 마치 천상이나 꿈속을 거니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옥색 빛깔에 현혹되어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 순간의 감동이 최고, 최선이 아닌가.

   이 요스테달 빙원(Jostedalsbreen)은 노르웨이 서안의 노르피오르(Nordfjord)와 송네피오르(Sognefjord) 사이의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요스테달 빙원(Jostedalsbreen)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빙하로, 총 면적 487 km²이며 빙하의 두꺼운 부분은 두께가 600m에 이른다. 그 동안 온난화 기후변화로 많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빙하와 주변지역은 1991년 요스테달스브렌 국립공원(Jostedalsbreen National Park)으로 지정되었다. 요스테달 빙하는 낮은 기온보다는 주로 고산지역의 많은 적설량에 의해 유지되고 있으며, 쌓인 눈의 압력으로 다져져 육지의 일부를 뒤덮고 있다. 여름철에는 주변지역의 얼음은 계절에 따라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요스테달렌(Jostedalen) 계곡을 향해 천천히 흘러내린다. 빙하에서 가장 높은 지점은 해발 1,957m이다. 빙하가 녹은 물과 양쪽 폭포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모여 산 아래로 흘러내려 간다. 빙하가 푸른빛을 띠는 이유는 빙하가 햇빛의 여러 색깔 중 푸른빛을 흡수하지 못해서라고 한다.

   점심은 현지식으로 감자와 샐러드가 주요리였다. 배불리 먹고 다시 달린다. 이제 모두들 꼭 같이 펼쳐지는 풍광. 계속 이어지는 설산, 폭포수, 초봄의 새싹에 무심, 무감각해진 듯, 존다고 몇몇은 그냥 고개가 떨어져라고 늘어뜨린다. 나도 깜빡깜빡한다. 고개를 떨어뜨리다가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다시는 올 수 없는 이 곳, 재회할 수 없는 풍광인데……. 하면서 눈을 부릅뜬다. 이 감동과 기분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내 마음의 행복과 쾌적감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에 눌려있는 것은 아닌지. 오후 3시쯤에는 세계에서 두 개밖에 없다는 빙하박물관 피얼란드를 찾았다. 독특한 디자인에 편안하게 느껴지는 박물관이다. 빙하의 역사와 웅장한 자연환경을 체험할 수 있는 영상과 전시물을 제공한다. 빙하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젊은이 네 명으로 구성된 탐험대의 활약을 그린 20분짜리 아이맥스 영상물을 시청하였는데 실감이 난다. 빙하에 대한 이해가 좀 된다. 얼음 인간 외치를 재현한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외치는 5300년 전 사람으로 사망 당시 40~53세로 추정된다. 우리 내외는 우리보다 배나 더 큰 북극곰 박제 앞에 ㅊ작가의 연출로 마주보는 포즈를 어색하게 취하면서 찰칵. 이어지는 길에서 보는 풍광도 여전히 그냥 잘라서 장방형의 프레임에 넣으면 멋진 그림엽서가 될 것 같다.

   2016. 5. 22(일)16:06~18:41 노르웨이 송네피오르드 만헬러-포드네스 FERRY이동-LAERDAL호텔

   이어서 송네피오르 구간을 통과한다. 흐리더니 비가 오고 있다. 맑은 날씨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은 과욕일까. 문득 집에 돌아갈 날짜가 다가오니 안도의 감정보다 답답한 심리적 압박감이 도지는 것 같다. 만헬러~포드네스 구간은 20분 정도 걸리는 페리로 이동. 추적추적 비오는 길로 해서 라르달(LAERDAL)에 도착했다. 앞에 천연호수가 아담하게 펼쳐져 있는 라르달 호텔의 객실에 들었다. 여기는 초봄의 단비가 될까? 여사(旅舍)의 차창에서 비치는 물방울은 여전히 객수(客愁)를 북돋운다. 줄여서 여수(旅愁). 참 오랜만에 써보는 단어다. 저녁 식사 전에 빗속을 걸어본다. 아내는 그냥 쉬고 있다. 이 순간은 모든 것을 잊고 오롯이 나그네 심경이 되어 앞으로 걸어갈 생각만 할 뿐이다.[2016. 5. 22. 일. 흐리다가 비.]    2021.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