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생애 첫 우리 집에서의 하루하루는 꿈결같이 흘러갔다. 과수원 가운데 있는 집이라 아침 새소리에 잠이 깨고 저녁 기차소리에 잠이 들었다. 우리는 비로소 신혼의 달콤함을 맘껏 누릴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가 우리 혼인사에서 가장 자유롭고 거칠 것이 없었던 때 같다. 그러나 아내의 마음 한켠에는 우리 아기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잊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의 생활은 점점 안정이 돼 갔다.
우리는 세 번 보고 혼인에 돌입한 대신 4년이라는 그보다 몇 십 배나 긴 시간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해 갔다.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완전체로서의 출발이라기보다 완전체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과정이라는 걸 배웠다.
옛 사람들은 서로 얼굴 한 번 못보고 첫날밤 치르고 난 뒤 아침에 처음으로 신랑 얼굴 신부 얼굴 보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래도 아들 딸 다 잘 놓고 백년해로 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단지 인습에 치우치거나 굴종적인 것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겠다.
그 해 4월에 우리 집에 이사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장날 시장에 가서 목련, 살구나무, 감나무 묘목을 사서 심는 일이었다. 비로소 한 뼘 뙈기 마당이라도 심을 공간이 있어 우리 집에 살고 있음이 실감 났다. 이어서 담쟁이, 라일락, 줄장미도 심었다. 우리는 언젠가 이 꽃나무들이 커서 풍성하고 아름다운 잎과 꽃을 피울 걸 큰 희망으로 삼고 하루하루 보냈다. 미구의 우리아가와 함께 꽃밭을 거니는 꿈도 자주 꿨다. 봄결 같고 꿈결 같은 세월이었다.
집 옆의 사과밭에서 알 수 없는 노린내가 풍기면 봄철 사과나무 닭똥거름이 마무리 된 줄 알 수 있었고, 우리 집 담 너머 손을 뻗으면 새빨간 사과 알이 잡힐 듯 하면 가을이 지나가는 줄 알았다.
다시 겨울이 닥쳐왔다. 유난히 긴 겨울이었다. 겨울이 끝나갈 2월 중순 무렵이었다. 갑자기 아내로부터 터져 나오는 듯한 울음 섞인 전화 목소리가 전해졌다. "여보…….나 임신이래요…….2주차…….흑흑" 순간 나는 아내의 그 목소리 실감나지 않았고 내용은 더욱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그건 아내가 마음 졸이면서 병원에 가서 진단 받은 결과였다. 세상에 기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면 바로 우리의 이 경우를 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혼인 후 5년만의 감동의 회임 소식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삶에서 기다림의 철학, 그 미학만큼 큰 행복은 없다"는 우리의 신념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아내는 이제부터 지나가는 배불뚝이 여인네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됐다. 아내는 이제 최소 2년 내에 그렇게 듣고 싶었던 "엄마!"라는 아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다.
생명은 어떻게 해서 탄생되는지 하늘만이 안다는 게 증명되었다. 처음 아내는 어떤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한 결과 자궁이 어린 여자아이 것처럼 미성숙한 것 같다는 소견을 의사로 부터 들었다면서 크게 낙담하면서 울면서 절망의 한숨을 쉬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우리 내외 모두 임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진단도 받았다. 그 동안 임신에 좋다는 약제는 물론 양방, 한방에서 침구 민간요법까지 다 처방했음에도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 꿈이 실현되다니. 도저히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한편 나는 우리가 이사한 이 집의 풍토가 임신을 도왔다는 가설도 떠올려보았다. 특히 이사 후 음용한 지하수가 알칼리성 체질 변화를 가져와 임신에 작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바 전지훈련 같은 개념이랄까.
이후 이사 온 이집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점지한 복 터이고 명당이라는 신념이 더욱 굳어져서 31년 넘도록 살게 되었다. 주변에서 재테크나 분위기 반전 차원에서라도 좀 옮겨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여느 많은 신혼부부는 허니문 베이비라 해서 첫날밤만 지내면 으레 임신이 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달리우리는 오랜 기다림의 인내 미학으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에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꿈결 같은 열 달이 지났다. 아이의 태동도 신기하고 태교도 즐거웠다. 그해 9월 말 경에 우리는 꿈에도 그리던 공주님을 만나게 됐다.
아내가 심한 산통을 느끼면서 인근 산부인과에 들렀을 때 의사는 모두 부재중이었다. 지역 산부인과학회가 있어서 참석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많이 불안했다. 우리는 80 리나 떨어진 이웃 도시에 연락한 후 택시의 비상등, 비상깜빡이를 켜고 무사히 종합병원 산부인과에 입원하게 되었다. 혹 차 안에서 출산하거나 잘못될까봐 전전긍긍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한숨이 쉬어진다.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우리의 제 1성이다 "아가야,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디 갔다가 지금 왔니?" 그러니 아가는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알았다는 듯이 살짝 웃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아가와의 첫 만남 만큼 감동적인 순간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아이가 태어나서 우리에게 온 것을 기려서 몇 편의 시를 짓기도 했다. 그 감동과 감사를 그만큼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 때 어린이날, 아내의 호소가 들리는 듯하다. "바보 같은 자식이라도 있어서 내게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 한 번만이라도 듣고 싶은 게 소원이예요."라고 하는 말. 돌이켜 보면 생명 탄생의 불가사의함이 제 1의 기적이라면 그 기적을 바탕으로 서너 번 보고 인생을 맡겨서 41년 동안 같이 살아온 우리들의 삶이 생애 제 2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그 기적을 바탕으로 신뢰, 인내, 사랑의 힘을 키워 우리의 삶을 지켜왔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이다.
그 아가가 올해 서른여덟 살이 됐고 다섯 살 아들과 두 살 딸의 엄마가 되었다. 그 아이를 위해 지었던 시편을 올해 아이의 생일날에 다시 전해 주고 싶다. 2022.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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