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나는 이제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하는 생각을 모은다. 오늘이면 나는 한 달반 동안 내 생애에 가장 치열한 시기를 기록하고 저장하면서 여기를 떠난다. 자의든 타이든 인간은 어차피 어디론가 떠나야하는 존재다. 그 동안 같이했던 많은 존재들에 대한 기억과 아쉬움, 그리운 정이 더욱 새삼스럽다. 마치 다시는 못 올 먼 여행지를 떠나야 할 때의 아쉬움이 이제 뭇사람들과의 봉별(逢別)에서도 드러난다. 엊저녁부터 주섬주섬 꾸렸던 한 달 반의 생활이 기내용 캐리어 하나에 그대로 담긴다. 그러면서 남아 있는 존재들 모습을 내 가슴에 담아본다. 다 담을 수 없다싶으면 폰에 담아보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한 달 반 동안 입원, 수술, 회복, 재활의 시간을 보냈다. 모두 난생 처음 체험이다. 종일 세 끼 먹고 난 뒤 걷다가 쉬면서 잠시잠깐 잠으로 휴식하기도 한다. 내가 보조기 신세라 아이들을 안아주며 놀아주지는 못한다. 눈 맞춤으로, 옹알이 말 맞춤으로 놀아준다. 틈만 나면 딸 내외, 아내와 어울리기도 애썼다. 퇴원 초기에는 거의 절반을 누워서 지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내 길어진 머리카락이 뒤로 젖혀져 반백의 올백 스타일이 되었다. 그런 나의 모습은 나로서도 참 낯설었다. 거기서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모습이 드러난다. 아버지의 얼굴이다. 내 얼굴에서 아버지가 나오신다. 눈매니 입매가 거의 같다. ‘헛, 내가 그렇게 잘 생긴 인물이었더란 말인가.’ 아버지는 젊은 시절 인물 좋다는 주변의 평판을 많이 들어왔던 터다. 그 동안 내 일신 하나 힘들다는 이유로 아버지를 잠시 잊었던 내 민낯도 드러난다.
또 한 얼굴이 서서히 떠오른다. 내 얼굴에서 마치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할 때처럼 흑백으로 드러난다. 6년전에 가신 어머니 모습이다. 가을 안개 사이의 마른 고목이 바람 치면 실루엣으로 드러나듯 하는 어머니 모습이다. 내 콧잔등이며 뺨이며 귓불이 어머니 것 그대로다. 내 어렸을 때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다가도 그 얼굴에 대한 짙은 그리움에 잠긴다. 지난 해 봄여름 날에 걸쳐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를 간병해드린 적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병상에는 아버지 얼굴은 간 곳이 없고 36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누워계셨다. 특히, 눈매, 콧날, 입매가 그대로 판박이셨다.
나는 여기서 둘째 외손자의 얼굴에서도 제 어미 이맘때의 모습을 본다. 눈매, 입매, 볼이 바로 제 어미 것이다. 제 어미가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선물이듯이 이 둘째도 제 어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복덩이다. 얼굴 속에 얼굴이 있다. 얼굴 속에 얼굴이 있고 또 얼굴들이 있다. 얼굴 속에 셀 수도 없는 얼굴들이 나온다.
나는 이제야 알겠다. 세상의 모든 할미, 할아비가 왜 손자, 손녀바보가 되는지 알 것만 같다. 딸 바보, 아들바보 라는 말보다 손자손녀 바보라는 말이 더 많이 들린다. 그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보기 때문이다. 참 익숙하고 친근한 이미지다.
우리 내외는 딸 내외 아이들의 이맘때 쯤에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고 자주 말한다. 11개월 차이도 안 나는 우리 아이 둘을 키울 때 생각나는 거라곤 이것 하나다. 둘째를 낳고 일주일도 안 돼서 밤새 칭얼대거나 자지러질 듯이 울면 첫째도 또 깨서 울어댄다. 우리 내외는 하나씩 안고 업고 하면서 밤을 샌다. 그런 순간만을 우리 내외는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가 우리 내외에게 인생의 전성기 때였다. 이건 ‘어쩌면’이 아니라 ‘틀림없이’다. 그렇게 우리 남매를 키우면서 주변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아니 이 말은 실로 우리 내외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커서 어떤 삶을 살아간다하더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의 목 가누기, 옹알이하기, 눈 맞추기고 서로 웃어 보이기, 뒤집기, 기기, 앉기, 홀로서기, 엄마, 아빠 한 마디 듣기, 손잡고 한 걸음 떼기, 걸음마하기 등 그 자람의 전 과정이 경이로움이고 기적이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는 그 때 이미 그 아이를 통해서 기적과 경이로움 등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한 걸 보상받았기 때문이다. 자식한테 더이상의 보상은 욕심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말 배우기, 자기 주장하기 발달 단계에서 그 기적은 최고조를 이룬다. 아이 엄마 아빠의 아이들 키우는 소리는 아름다운 합창도 되고 멋진 메아리가 되기도 한다. 옛사람들은 집안에는 세 가지 소리가 들려야 한다고 했다. 아이 울음 소리, 책읽은 소리, 다듬이 소리는 화음을 이루니 집안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여기를 떠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우는 소리와는 아주 멀어질 것이다. 사람이 이승을 하직할 때도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22.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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