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아재, 나의 아재 3
청솔고개
나는 당시 어린 나이였지만 어른들로부터 삼촌에 대해 들은 이러저러한 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있다. 삼촌이 대학 다닐 때 하숙집 딸과 사귀어서 결국 혼인까지 이어졌다. 혼례는 우리 고향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로 치렀다. 그때의 정경(情景)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강렬하게 남아 있다.
초례상에 진열된 청홍색 양초, 밤을 물린 장닭, 대추를 물린 암탉, 술, 소나무, 대나무, 향불 등은 하나하나가 다 양인(兩人)과 양가(兩家)의 인연을 더욱 소중히 한다는 의미가 내포 돼있다는 것은 내가 나중 커서 알게 된 사항이다. 나무로 깎은 기러기를 올리는 신랑이 올리는 전안례(奠鴈禮), 초례상 앞에서 신랑은 두 번, 신부는 네 번 서로 절을 주고받는 교배례(交拜禮), 신랑 신부가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합근례(合巹禮)가 주축이 된 혼례식은 그 자체가 격조 있으면서도 경쾌하고 시적인 느낌이 들었다.
특히 그날 열 분 이상 되는 삼촌 우인(友人)들의 우인축사(友人祝辭) 낭독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친구의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뜻을 간절히 담은 글을 두루마리에 세로로 써서 줄줄 펴면서 읽어가던 모습이 선하다. 지금의 판에 박은 듯한 주례사와는 대비가 된다.
진행자인 집사의 ‘신랑신부는 서로 절을 나누라’는 뜻의 “행교배례(行交拜禮)!”같은 한문 투의 진행 방식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오래 전 내가 혼인할 때 나도 강하게 전통혼례로 하려고 했다가 결국 준비가 힘들어서 그만 두었던 게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은 것도 어린 시절의 이런 강렬한 인상 때문인 것 같다. 신속정확하다 못해 경박하기까지 비쳐지는 요즘의 결혼관습과는 많이 다르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인생 4대 행사가 관혼상제(冠婚喪祭)다. 외국의 어느 저명한 문화인류학자가 한국의 전통장례인 꽃상여행렬, 상두꾼의 소리, 삼년 상 절차 등을 접하고는 이는 지구촌에서 죽음을 가장 시적(詩的)으로 승화하였다고 평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전통 상례절차를 통하여 인간의 죽음은 삶과 결코 분리되지 않은, 이어져 가는 그 무엇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내 어린 시절의 삼촌의 혼례식에 대한 이런 생각도 삼촌의 저렇게 힘겹게 투병하시는 이 시점에야 떠오른다. 그간 훌쩍 덧없이 흘러가버린 시간들이 야속하다. 불과 한 해 전까지만 해도 거의 이틀에 한 번씩 “조카야!”로 내게 전화하시곤 하셨다. 어떤 때는 그 목소리가 거의 울먹이는 듯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당신의 기약 없는 요양원 생활에서의 외로움과 힘듦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당신의 형님의 안부를 꼬박꼬박 물으시고는 한 번도 빠짐없이 “우리 더 자주 연락하고 지내자.”하시던 그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하다. 2023. 3.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