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빈집에서 4, <그리도 평생토록 즐기시던 피아노를 힘겹게 치시더니 한숨을 푹 쉬시면서 “아! 이제는 안 된다. 다 됐다." 탄식하고 크게 실망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청솔고개
제법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는 뭔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는 종이 뭉치가 보인다. 그 안에는 아버지께서 즐겨 가시던 일본 배낭여행에 대한 자료가 가득하다. 아버지보다 너덧 살이 더 많으신 어떤 분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고등학교 졸업해서 일본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하면서 일본 배낭여행단을 꾸려서 너덧 번 정도 다녀오신 그 결과물인 셈이다. 일본 전역 지도, 신칸센 지도, 홋카이도 약도 등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군데군데 아버지 필체로 꼼꼼히 메모해 놓으셨다. 누구보다도 평생을 통해 여행과 방랑, 산행과 산책을 즐겨하셨던 아버지의 생애 면모가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중요한 여행 정보와 자료가 도처에 잘 보완돼 있다. 몇 군데는 일본어로도 기록해 놓았다.
전통가요를 아주 즐기셨던 아버지를 위해 내가 폰에 저장된 곡목 순서대로 가사를 출력해서 몇 차례 드렸었는데 그것마저 고스란히 보관돼 있었다. 피아노 위에는 낡아서 너덜너덜한 악보집도 여남 권 아직 꽂혀 있다. 옛날 가요, 동요, 가곡집 등이다. 아버지의 피아노 연주는 노경에 유일한 힐링의 방편이었다. 외롭고 그리운 모든 감성을 표출하고 조절하는 가장 소중한 도구였던 셈이다.
아버지가 코로나19로 근 1년 만에 요양병원에서 첫 외출 때 우리 남매들은 아버지에게 오늘 모처럼 외출이 가능한데 어디 가고 싶으신지 여쭈었더니 바로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시어 집으로 모시었다. 당신이 평생 사시던 그 집에 그리움이 얼마나 절절하셨을까? 들어가자마자 피아노 건반을 열어드렸다. 그리도 평생토록 즐기시던 피아노를 건반을 힘겹게 두들기시더니 한숨을 푹 쉬시면서 “아! 이제는 안 된다. 내 다 됐다.”하고 장탄식하신다. 크게 실망하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벌써 그 때 아버지의 운동과 인지 기능은 그 자연 수명이 다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당신께서 주변 인간관계와 관련된 매개물에 대해서 하나하나 절대적 가치를 두시었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그대로의 아버지 모습이다.
그러한 습성이 유전자로 나한테도 물려진 듯하다. 나도 초임 교사 때나 그 이전에 내게 온 친구들, 제자들의 편지 한 장, 엽서 한 장도 아직까지 함부로 버리지 못해 고리짝에 차곡차곡 모셔놓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내가 전 생애를 통해 보관이 가능했었던 자료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의 중·고 시절의 자료는 나의 부재와 잦은 이사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의 다 멸실되어 버린 건, 모교의 개교 80 주년인가를 기념하기 위한 졸업생 자료 모으기에 협조하기 위해서 나의 당시 자료를 찾았을 때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그 허탈함, 상실감에 대한 학습효과라 할 수 있다. 일종의 편집증이나 강박증 같은 것은 아닐까 싶다. 뭔가를 잘 놓아주지 못하는 이 습성은 정신건강 의학상 상담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 다행히 나의 핵심 자료인 생애기록물, 통지표, 졸업장, 상장 같은 건 다행히 보관돼 있다. 이는 나의 평생 정체성 확립의 근거가 되는 것 같다. 202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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