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라오스 비엔티안을 다녀온 지 두 달이 더 지났다. 그런데도 벌써 또다시 그곳이 그리워진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은 심정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 나는 이제 그 나라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사슴 뿔에 꽃이 피어나는 나라”라고.
비엔티안의 여행자 거리에 자리 잡은 내가 묵던 숙소에서 베란다에서 고개를 들면 멀리 메콩강이 보인다. 건기라서 강물은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겨울철인데 강안(江岸)은 풀이 무성한 초원이다. 숙소에서 3분만 걸어가면 메콩강 둑이 보이고 야시장 터가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를 바로 지나면 둑길 옆을 따라 아래쪽으로 아담하고 제법 널찍한 공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어느 새벽녘, 기온도 서늘한 터라 나는 마음 먹고 이 강가의 새벽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혼자 호텔을 나섰다. 열대의 새벽 기운은 한낮의 따스함과는 또 다른 생기와 청량함을 안겨준다. 나는 물 한 통과 비스킷 몇 조각을 준비해서 공원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공원 안에서 풍겨오는 그윽하고 은은한 향내가 내 새벽잠을 확 깨운다. 묘한 체험이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이곳 말로 참파 꽃이라고 하는 플루메리아꽃이었다. 옅은 흰색, 붉은색, 노란색, 아주 흰색 등 여러 종류의 참파가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그 꽃나무 아래 곳곳에는 일찍 피었다가 이미 져버린 참파 꽃잎들이 아직도 소담스러운 자태를 하고 있었다. 뚝뚝 떨어져서 쌓인 모습은 이곳 여인네들의 작달막한 손바닥 같다. 떨어져 누운 꽃들이 하도 얌전해 보여서 그 자리에서 잠들어 있는것 같았다. 이방의 나그네에게 알 수 없는 연민을 자아낸다. 그 위를 쳐다보니 내 키보다 살짝 더 높아 보이는 나뭇가지 끄트머리에는 소담스러운 꽃잎들이 메콩강가의 새벽안개에 젖어있었다. 그 옆의 참파 꽃나무에는 꽃이 이미 져버린 것인지, 아직 꽃의 움이 트지 않아서 그런지 뭉뚝뭉뚝하게 보인다. 마치 시베리아의 순록 뿔 같아 보인다. 어떤 참파 꽃나무에는 그 뿔의 끝마다 얌전하고 동그란 그 꽃이 막 돋아나거나 혹은 풍성하게 달려 있기도 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참파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참파 카오라는 흰색, 참파 댕이라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 참파 르앙이라는 노란색, 참파 라톤이라는 순백 등이다. 그날 새벽에 내가 맨 먼저 본 것은 아마 참파 라톤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그 새벽, 내 눈에 현현한 그 꽃잎의 첫인상에서 왠지 알 수 없는 아련한 슬픔이 떠올려졌다. 이 나라에서는 참파 라톤은 눈물의 참파라는 다른 이름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 눈물의 참파 화심(花心)은 짙고 깊은 노란색이다. 그것은 화심의 깊은 곳에서 배어나는 어떤 슬픔 때문일까.
이후 내가 비엔티안에 보름 동안 지내면서 나는 이 꽃이 주는 인상에 많이 익숙해져서 어디와 닮아 있다 싶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게 있다. 그 포근하고 안온한 인상을 찾아볼 수 있는 두 대상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묵고 있던 숙소의 한 청년의 해맑은 미소에서였고, 다른 하나는 비엔티안에 도착하자마자 맨 처음 들른 마사지샵의 한 여자 마사지사의 표정에서였다.
그 청년은 우리가 하루에 두세 번 드나들 때마다 숙소 입구 어디엔가 있다가 우리가 나타나면 황급히 달려와 문을 열어주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 청년은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리도 이 청년의 도움을 의례적인 서비스로 여기고 심상하게 생각했었다. 사실 호텔 입구 바깥 통유리 출입문은 제법 뻑뻑하고 육중하여서 팔의 근력이 약한 노약자는 버거울 듯도 하였다. 그 청년의 미소와 배려에는 날이 갈수록 진정성이 느껴졌었다. 우리도 그때마다 환한 미소로 “컵짜이, 라이라이”하고 화답하곤 하였다. 생전 처음 와서 지내는 낯선 곳이라 익숙하지 않아 더러 하루 일과에 차질이 생기고 때로는 이곳의 더위와 먼지에 찌들어도 그 청년의 순백(醇白), 순정(純情)의 미소를 대하노라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보다 더 감복하는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갓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총각이 저렇게 열심히 자기 일을 한다면서 감동어린 표정을 짓곤 하였다. 아내는 근처 야시장이나 식당을 다녀오면서 카스테라, 바나나, 망고주스 음료 등을 하나씩 더 구입하고는 참파 라톤을 닮은 그 미소의 청년에게 슬쩍슬쩍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나라의 국민들이 지난날 거센 외세 도전으로 열악한 경제 환경에 처해 있어도 미소와 여유를 결코 잃지 않은 것은 국화(國花)로 삼은 참파꽃의 심성을 본받아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참파 꽃을 피우는 순록의 뿔 같은 그 무딘 나뭇가지의 부드러움을 닮아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참파 꽃의 그 은은한 향과 그윽한 자색(姿色)을 지닌 나라이기에 방문객이 끊이지 않은 것 같다. 참파 꽃의 향과 아름다움을 닮은 미소가 배어있기에 그 세계적인 문화 유적이나 특별한 볼거리가 많고 적음을 떠나, 나는 매년 우리의 엄동설한 철이면 참파 꽃 은은한 향내를 따라 여기로 떠나오고 싶어질 것이다. 그 총각의 미소를 보러 여기로 달려오고 싶어질 것이다. 틀림없이.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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