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2024. 1. 26.
치앙마이 온 지 사흘째다. 어제 아이의 깜짝 선언 같은 엄청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이 말대로 이런 일을 겪고도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면 정말 발전적인 것이고, 그 회복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더욱 발전적인 거니까. 이제 보니까 내가 공부하던 상담과 정신건강 의학 분야에서 ‘회복탄력성’이라는 게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이 회복하는 주기가 일상적이지만 아이한테는 무척 길어지는 것이 다른 것 같다. 아무튼 아이가 이번 기회에 자신을 극복하는 좋은 계기나 전기가 됐으면 다른 소원이 없을 것 같다. 그야말로 비 온 뒤 오히려 땅이 굳게 되는 격이니까.
오전에 샤워하고 나와서 카톡을 보니 아이가 메시지가 떠 있다. 전화하니 어디냐고 묻는다. 룸이라고 했다. 전화했었는데 두 분 다 안 받으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방으로 들리겠다고 한다. 아이한테서 또 무슨 선언이 있을까 봐 마음이 무겁다. 나는 어쨌든 견딜 수도 있지만 제 어미는 또 다른 입장일 테니까.
어쨌든 오늘부터 우리도 이제 홀로서기에 도전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제 아이가 가르쳐 준 볼트 앱으로 택시 잡는 법을 열심히 연습해 보았다.
아이가 왔다. 우리한테 오늘 코스를 답사하는 데 필요한 필수 요건인 택시 잡는 법의 실제를 보여주겠단다. 아이가 호텔 앞 마당까지 도착하도록 하는 택시 탑승의 시연을 보여준 셈이다. 이제부터 아이는 재충전하러 ‘방콕’할 것이다. 아이의 타고난,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성향이니 우리도 어쩔 것인가. 다만 아이가 이번 일로 더욱 거듭났으면 하는 게 우리의 소망일 뿐이다.
택시로 예약한 왓 쩨디루앙에 도착했다. 큰 탑이 있는 사원이라는 뜻이다. 14세기 무렵 란나 왕국의 7대 통치자 센 무앙 마 왕이 아버지 쿠나 왕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당시 90m에 달하던 탑은 1545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인해 30미터나 무너진 붉은 벽돌로 짜 올린 거대한 사리탑이다. 1992년에 탑 주변 복원 작업은 마쳤으나 탑 자체의 복원은 진행되지 않아 현재 약 60m만 남아 있다. 이 탑이 이 도시의 운명과 역사를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치앙마이 구시가의 상징이다. 치앙마이에서 많은 걸 안 보아도 될 것 같다. 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듯했다. 왜냐하면 무너져 폐허처럼 된 그 모습이 바로 태국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어서였다.
뭣보다도 내게 눈길을 끄는 것은 왼쪽 등 세 군데 서 있는 거목이었다. 가장 이국적이고 태국적이다. 거목의 껍질은 이 나라의 상징인 코끼리의 피부를 닮았다. 도대체 무슨 나무일까. 아내도 찬탄을 금하지 않는다. 그 느낌은 아프리카 마다카스카르의 바오바브나무 같았다.
법당 한 곳에 들어갔는데 어떤 고승의 밀랍 인형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정교해 보였다. 순간 섬찟했다. 아내는 나보다 더 한 것 같았다. 약간 자라다 만 머리카락, 터져 검붉게 번진 팔뚝 핏줄, 얼굴 피부 감촉의 시각적 느낌이나 목주름까지도 사실 그 자체였다. 눈동자도 살아 있는 듯했다. 특이한 인상이었다. 나중에 번역기를 돌려보니 밀랍 인형을 모시는 법당은 당시 유명한 건물의 4면 파빌리온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다고 돼 있다.
다음은 왓 프라싱 사원 차례다. 구글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다. 뭔가 이상해서 서서 다시 확인해 보니 목적지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걸 알 수 있는 것은, 원래 9분 거리로 나오는데 12, 13분 거리로 시간이 더 많아져서 나타난다. 이상해서 되돌아왔던 길로 다시 가니 차차 도착 시간이 줄어든다. 지도 보고 길 찾는 게 익숙해지는 듯했다. 자신감도 솔솔 붙는다. 내 생전 처음 체험이다. 이렇게 길 떠나니 모든 게 새롭다.
이 사원에서는 거대한 황금 불상, 황금 사리탑, 다양한 조각품과 내부 벽화의 정교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 민중들의 불심과 그 예술성의 일치를 목도(目睹)한다. 법당 안 한 곳에서 일가족으로 보이는 방문객이 스님에게 뭔가 축원을 빌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무척 진지하다.
사원 출구에서 아내가 다시 치킨을 먹고 싶다고 한다. 가장 가까운 치킨 가게를 검색한 후 도착하기 위해서 볼트 택시를 예약해 보았다. 다시 홀로서기다. 예약이 잘 된다. 잠시 후 주문 번호 택시가 반대편 차로에 서 있었다. 우리가 먼저 도착 예정 지점에 가서 기다렸어야 했던 것이었다. 여기가 우리와는 정반대 편의 주행 도로를 잊고 있었다. 급한 마음으로 길을 건너 택시로 다가갔다. “싸와디!”하고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내릴 때는 우리가 “콥쿤!”하고 인사했다. 그러면 예외 없이 치앙마이인들은 그 사람 좋은 표정과 미소로 응답해 줘서 우리가 더 행복해진다. 인사말 먼저 하는 것은 뭔가 해 냈다는 자신감과 만족감의 발로다. 가게에 가서 먹어보았던 KFC치킨 맛은 기대에 못미친다고 아내가 말했다.
아내는 다시 보라 마트에 가자고 한다. 내일 아침 햇반 등 먹을거리를 사야 한다고 한다. 구글 지도를 켜서 가보는데 도무지 방향 감각이 안 선다. 진행해 보니 좀 멀어지는 듯해서 살짝 오던 방향으로 틀어서 가보니 도착 시간이 점점 짧아진다. 도착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식품 위주로 취급하는 보라 마트 입구가 보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또 하나 이룬 것이다. 당장 필요한 먹을거리를 사서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사들인 먹을거리를 냉장고에 보관하고 조금 쉬었다.
오늘 저녁 식사 전 코스로 계획한 마사지숍에 들러보기로 했다. 티 마사지로 결정돼 가는 길을 검색해 보았다. 10분 거리로 나타났다. 구글 지도 켜서 골목골목으로 해서 찾아가니 제대로 된다. 호텔 뒤편 마을의 골목은 생각보다 무척 깨끗하고 정돈이 되어 있다. 순박해 보이는 여자 마사지가 1시간 정성껏 만져준다. 눈이 마주치니 내게 웃어도 보인다. 태국어로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뭐라고 응답하는데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다. 고마워서 20밧 팁을 건넸다. 돌아오는 길가 골목 식당 두 곳에 손님들이 바글바글해 보인다. 자세히 보니 두 곳 모두 미쉐린 인증받은 곳으로 돼 있다. 한번 와보자고 아내와 얘기했다.
호텔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외출해 본다. 야시장 가기 위해서다. 제법 멀다. 18분 정도는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 보는 법이 많이 는 것 같다. 오른쪽의 올드타운 성벽이 조명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다. 그 성벽을 기준으로 해서 계속 걸었다. 드디어 야시장 분위기가 눈에 확 들어온다. 눈요기부터 했다. 바나나가 든 와플을 구워 파는 곳이 무난하다 싶어서 와플을 사 봤다. 돌아 나오다가 아내의 눈은 새우튀김에 꽂힌다. 탐스러워 보이지만 거친 느낌이 든다. 조심해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기대한 건 아니지만 새우 속살이 그리 많지 않았다. 새우 안주로 맥주 한 병 시켜서 기분을 내 본다. 앞뒤 양옆에는 한둘 제외하고 거의 서양인들이다. 이 도시는 여행객을 불러 모으는 곳이다. 고향 시가지와 견주어본다. 거기에는 이런 정도의 인기몰이하는 야시장이 없다. 중앙시장 곁의 야시장은 그 규모에 있어서 비교 불가다. 역시 이 나라는 관광대국이다.
오는 길에 인도가 고르지 않아서 자칫하면 발을 삘 것 같았다. 무심코 휴대폰 보면서 걷다가는 자칫하면 다칠 것만 같아서 자꾸 조심 된다. 술 한잔했기에 더욱 발밑을 주시하면서 걸었다. 한참 오는데 밤에도 휘황찬란한 조명등을 설치해 놓은 사원이 있어 들어서 한참 살펴보았다. 출입문 양옆의 코끼리 상이 무척 특이했다. 안개를 뿌옇게 뿜어대고 있어서 무엇인지 궁금했다.
오늘 15,000보를 걸었다. 피곤해도 며칠 밀린 여정 기록을 새벽 3시까지 마무리했다. 내 삶의 의미는 기록에 달려 있다. ‘적자생존’이다. 아이와의 동행 없이 우리만의 여정은 이어진다. 아이가 바라던 대로이며 우리는 홀로서기다. 2025.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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