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30년도 더 전이다. 직장 동료 하나가 스키 타기에 막 빠져드는 중이었다. 그는 스키 전도사를 자처했다.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스키 타기의 매력을 틈만 나면 호소하곤 했었다. 지금껏 내가 시도 보았던 스포츠, 예컨대, 테니스, 축구 등은 체력과 체격 조건이 맞지 않아 몇 차례 시도해 봤지만, 도중에 포기했었는데 내게 이런 제안은 무척 신선하고 매력적이라고 느꼈었다.
나는 속으로 '옳다구나, 이것이다. 이젠 스키다. 이건 체력보다 담력이 더 필요할 터. 이것만큼은 내가 반드시 마스터하리라' 하고 다짐했다. 그 스키 전도사는 스키장에서 대표적으로 스키 포기족의 행태를 이렇게 전했다. “스키장 아래에서 몇 번 연습한 후 바로 리프트 겨우 타고 올라가서 활강하려니 밑에서 보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경사에 기겁한다. 그 아찔함에 무릎이 꺾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활강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스키 둘러매고 털레털레 내려오는 사람을 본다.”라고 했다. 처음부터 포기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장비부터 먼저 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 말대로 스키 배우기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명과 실천을 위해 스키와 부츠부터 사들였었다. 그냥 놀기 삼아 스키와 부츠만 빌려서 어설프게 도전하다가 포기하는 우를 범하기는 싫었다.
드디어 난생처음 스키장에 갔다. 그 당시 상황. ‘나는 초급자 코스에서 A자로 천천히 지그재그로 턴하면서 미끄러져 내려온다. 오른쪽 턴은 이틀 만에 성공한다. 왼쪽 턴은 좀처럼 잘 안된다. 턴하다가 그냥 넘어진다. 그해 겨울 시즌 막바지 세 번째 방문 후 연습을 통해서 겨우 성공한다.’
스키 전도사는 또다시 강조한다. “처음부터 폼나게 잘 타려고만 하지 마라. 초급자는 잘 타는 그것보다 잘 넘어지는 법을 체득해야 한다. 스키는 미끄러운 눈을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 균형과 스피드를 동시에 잡아야 하므로 결코 안 넘어질 수 없다. 스스로 균형 유지 못해서, 혹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구조물에 부딪혀 넘어질 때 안전하게 넘어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부상을 방지할 수 있다. 설혹 다치더라도 그 대미지가 최소화된다.”
나는 일단 잘 넘어지는 법부터 배우기로 시작했다. 넘어지고 난 뒤 효율적으로 일어나는 법도 배웠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했다. 넘어지는 수많은 경우를 머릿속에 입력하면서 그때 어떻게 내 몸의 스탠스를 취하면 될까를 염두에 두었다. 나는 그해 시즌 막바지 3월 말경에는 중급자 코스를 넘볼 정도로 기량이 늘었다. 남처럼 활강할 때 미끄러운 스피드 감각을 즐겼다. 그건 또 다른 차원의 쾌감의 극치였다.
나는 현재 회복기 재활병원에서 6개월 5일, 척수 수술 후 치료 기간까지 포함하면 7개월 25일째 재활과 회복에 전념하고 있다.
이번 주에는 기능 강화반 상하지 자전거 타기 유산소 운동을 통해 30분 만에 303킬로칼로리를 달성했다. 석 달 만의 쾌거다. 담당 치료사는 20,30살 더 젊은 층이나 심지어 치료사들도 달성하기 쉽지 않은 기록이라고 했다. 노익장(老益壯)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기능 강화 반에서는 주 1회 건물 주변을 걷는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금까지 나는 잘 걷지 못해서 항상 느린 걸음 팀에 속해서 걸었었다. 303킬로칼로리를 달성해서 그런지 이번 주 걷기에는 치료사가 빠른 걸음 팀에 속해서 걸으라고 권유했다. 기분이 좋았다. 같은 시간에 느린 걸음 팀이 1~2바퀴 돌면 빠른 걸음 팀은 4~5바퀴 돈다. 나는 지시대로 빠른 걸음 팀의 맨 앞에서 걸었다. 내 안전을 위해서 실습 학생 치료사가 동행하도록 배치해 주었다.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겸허한 마음으로 나의 안전을 위한 대책이니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앞서 걸으면서 동행하는 치료사에게 내가 말했다. “우리 재활치료병원의 프로그램이 체계적이며 효율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병원 곳곳이 눈에 잘 띄는 곳에는 ‘낙상예방(落傷豫防)’이 붙어 있다. 낙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넘어지는 방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넘어지더라도 최소한의 손상으로 넘어지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는다. 애써 절대 안 넘어질 것만 강조한다. 넘어지면 곧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의 책임인 것만을 경고하고 있다. 암만 조심해도 넘어질 수 있다. 이를 대비해야 한다.” 치료사는 내 말을 듣더니 일단 수긍한다.
나는 다시 부연 설명한다. 앞에서 언급한 스키 배울 때 잘 넘어지는 법을 실례로 들어 얘기했다. “내가 스키 배울 때 잘 넘어지는 방법부터 배웠고 이후 오랫동안 스키를 즐겨도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재활치료에서 사회 복귀까지 일단 잘 넘어지고, 넘어지더라도 덜 다치는 구체적인 행동 양식은 무엇일까? 스키 배울 때 잘 넘어지는 방식을 원용하면 어떨까?”
한참 생각에 잠겨 본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와 배움에서는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는 법만 강조한다. 누군들 실패하고 싶어 하는 존재가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실패자는 곧 낙오자이고 루저의 꼬리표가 붙는다.
건강한 사회라면 잘 넘어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 사회 한 구석에 “잘 넘어지는 법을 가르쳐 드립니다.”라는 공익광고성 카피라이터를 발견하고 싶다. 2025.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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