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고향 집이 보인다.
논길 옆에 짜놓은 나지막한 담벼락이 보인다. 담벼락 안팎을 대추나무 등걸이 지탱하고 있다. 내 등줄기가 그 등걸을 닮아있다. 대추나무 가지는 작은할아버지의 거칠고 뭉툭한 손가락 마디마디다. 대추나무 가시는 작은할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있다.
담벼락 앞에는 바로 논이다. 그사이에는 구루마 길이 나 있다. 우리 집 구루마는 1년에 몇 차례 이 길을 지난다. 구루마는 우리 집 쓰리랑큰소가 끈다. 구루마는 이 길로 해서 큰 삽짝으로 출입한다. 농사일이 제일 바쁠 때 드나든다. 이른 봄 모내기 준비로, 논에 썰어 넣을 풀을 실어 나를 때다. 주로 떡갈나무, 속새 등 푸성귀를 우중골이나 명정 같은 아주 먼 산에서 베어서 싣고 온다. 모심기 하기 위해 갈아엎어 놓은 무논에 이 푸성귀를 넉넉하게 넣어서 다시 갈아엎는다. 푹 뜨고 검게 썩는다. 금비가 귀했던 그 시절에는 최고 우량질의 유기농 거름으로 작용한다.
늦여름에는 먼데 있는 보리밭에서 보릿단을 실어 큰 삽짝으로 들어온다.
가을에는 먼데 있는 논에서 나락 단을 실어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큰 삽짝이 훤히 열린다. 길은 바퀴 소리로 쿵쾅거린다.
사랑방 작은할아버지는 저녁마다 큰 삽짝을 닫았는지 살피신다. 밤손님이 혹여 구루마로 쌀가마라도 실어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맨 먼저 큰 삽짝을 훤히 열어 놓으신다. 그래야 '개문만복래' 말대로 복이 들어온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신다.
초봄이다. 구루마 논길 건너 논에는 물이 질벅하다. 논의 가장자리는 좀 깊이 파여져서 물길이다. 논바닥과 물길을 종일 들여다본다. 깊이 파본다. 어린 눈길을 사로잡는 다양한 물상이 보인다. 대자연을 대상으로 존재의 변환을 탐구하고 관찰하는 시간이다. 여기가 나의 우주요 세계다.
소금쟁이의 그 유연한 미끄러짐, 물방개의 자맥질과 솟구침, 논흙을 파대면 실핏줄처럼 꼼지락거리는 실지렁이…. 나는 종일 오월의 해가 중천에 오르는 줄도 모르고 쪼그려 앉아 논흙 파대기에 여념이 없다. 길가에는 물먹은 담우쑥이 자부룩하게 돋아있다. 독새풀은 쑥쑥 자라 있다. 길가의 뺍쨍이 뿌리에는 개미구멍이 보인다. 개미들이 쉴 새 없이 새봄맞이 단장을 한다. 질벅한 논바닥 파보는 것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다리가 저려온다. 일어난다. 구루마 논길을 따라 나간다. 수리조합 도랑 쪽이다. 왼편에 우리 집 북쪽과 서쪽을 감싸고 있는 대밭이 있다. 대밭에는 참새떼와 동박새 떼들이 재잘거리며 봄기운을 즐기고 있다. 그 뒤로 우리 논 두 도가리가 층을 이루고 있다. 그 윗도가리 위로는 마을을 꿰뚫고 있는 한길이 나 있다. 한길은 윗도가리 한 길 높이의 둔덕 위에 있다. 마을 말썽꾸러기나 모험 꾼들이 이 윗도가리 논에 더러 처박힌다. 면소 직원의 자전거를 몰래 타보다가 브레이크를 못 잡아서였다. 한길에서 한 길 아래 윗도가리 논으로 풀쩍 뛰어내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한참 자란 후였다. 뛰어내려 윗도가리, 아랫도가리를 종횡무진 질주했던 기억도 있다. 대밭 지나 짚베까리와 마닥 사이로 해서 집 안에 들어가 본 적도 몇 번 있다.
우리 집 앞 논 너머에 집 두 채가 있다. 그 집 뒤편은 대숲 울타리다. 그사이에는 늙은 살구나무 하나 있다. 살구 익을 무렵,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난 뒤 나는 거기를 달려간다. 혹 떨어져 있는 살구를 줍기 위해서다. 없어도 그 울타리 옆을 서성거린다. 노란 살구 하나가 곧바로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어느 한겨울이다. 논 너머 두 채 집 중 하나는 기와집이다. 기와집에 불이 났다. 지붕 토기와가 벌겋게 달아서 툭툭 터져나갔다. 나는 소란스러워 잠이 깼다. 잠결에 내복 바람으로 눈을 비비면서 목격한 충격적 장면이다.
위의 장면은 최근 들어 내가 새벽꿈에서 본 것들을 모은 것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눈을 감고 나도 모르게 가만히 떠올려지는 장면이다. 유년 시절 고향집이다. 가장 따스하고 포근해하던 그 시절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삼단같이 푸르던 대숲도, 고향 집과 조상님의 혼백을 지키려시던 할아버지의 억센 손마디를 닮은 대추나무 등걸도 사라졌다. 이제는 내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명상의 실마리다. 여생을 동반할 화두다.
사람이 과거에 집착하면 퇴영적, 혹은 퇴행적이라고 한다. 평가 절하 하는 것이다. 진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칠십 중반의 노인에게는 현실에서 파고들 과거조차 없다면 더욱 절망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부부는 "우리는 이제 파먹을 것도 다 떨어졌으니 다시 파먹을 추억을 더 쌓읍시다." 하면서 서로를 보면서 쓸쓸하게 웃곤 한다. 우리는 일을 시작할 때마다 "파먹을 추억을 쌓기 위해서"라고 명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겁나는 게 있다. 꿈이나 상념 속에서 유년 시절을 다시는 못 볼까 하는 것이다. 대밭 뒤, 논도가리에서 뛰놀던 장면, 집 앞의 논자락에서 해지는 줄 모르고 물방개의 헤엄침을 못 볼까 하는 것이다.
아직은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새벽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내 생애를 아우르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이 얼기설기 섞여서 꾸며지는 한편의 삽화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2025.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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