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n Here

내 청춘이 빛나던 순간 7, ‘동계 혹한기 훈련과 깊이 팬 헌데’

청솔고개 2025. 7. 2. 23:20

   청솔고개

   우리 부대는 전군최강이라는 명성을 이어가기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수행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었다. 전력 확보를 위한 맹훈으로 1년 365일 영일이 없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혹한기 훈련이다. 보통 12월 말, 크리스마스 이전에 일 주정도 진행된다. 우리 군은 언제 어디서라도 본래의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 평소 교육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혹한기라 해서 전투가 수행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이에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다.

   혹한기 야전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하면서 추위에 생존하는 훈련, 혹독한 환경에서 참호 조성하면서 진행하는 경계근무 훈련, 각종 병 기본 훈련 등이 주된 내용이다. 바깥은 영하 10도를 오르락내리락할수록 텐트 안팎의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훈련에 임하며 더욱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이 훈련 목적이다. 혹한기 생존과 전투력 증진 및 안전 대응을 강화하는 훈련 효과를 기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둔부와 사타구니에 종기가 여럿 생겨서 큰 고생 하고 있었다. 종기를 제대로 치료할 겨를조차 없는 최 신참 쫄병 생활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몇은 나도 모르게 터져서 옷에 달라붙어 버린 것도 있었다. 옷을 갈아입을 때는 억지로 뜯어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었다. 그 아문 흔적이 아직도 내 몸에 낙인으로 남아 있다.

   그 종기들은 자대 배치 후 바로 이어진 혹한기 쫄병 생활이라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와 근무 압박에 의한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것 같았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면역력이 저하된 게 헌데 발생의 원인이 틀림없다. 게다가 최소한의 신체 청결이라는 위생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게 보태진 것 같다. 몇 달 동안 목욕은커녕 가벼운 샤워 한번 못하였다. 70년대 당시 부대에는 목욕탕이 없었다. 겨울 삼동에는 병사들이 거의 목욕할 수 없었다. 강원도 양구, 중동부 전선의 겨울은 혹독한 추위보다 종기에 대한 고통과 불편함으로 더 힘들었다.

   운 좋게 외출을 허락받은 고참들은 외출 후의 급선무는 공중목욕탕 행이었다. 심하게 터서 갈라진 손발과 두껍게 내려앉은 온몸의 때를 벗겨야 한다. 외출 외박을 허락받은 그들은 읍내 공중목욕탕 욕조의 뜨거운 물에 느긋이 몸을 담가 충분히 불린 때를 벗길 수 있는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제 목욕탕 욕조에 푹 담가 있는 시간이 바로 천국의 시간이었다. 최 신참인 나로서는 그런 천국을 감히 요구하지 못했었다.

   종기와 상처를 달고 천신만고 끝에 혹한기 훈련을 간신히 마치고 귀대하는데 뜻밖에 아버지의 면회 신청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눈물이 날 만큼 반갑고 고마웠다. 통신학교 있을 때 아버지 어머니께서 함께 면회 온 후 이번이 두 번째다. 그때는 아버지 어머니가 모임에서 부부 동반 설악산 여행 중에 부대 근처를 지나치다가 아들이 생각나서 갑자기 일정을 조정해서 면회하셨다.

   이번에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나는 내 엉덩이와 사타구니의 종기를 호소했다. 일단 목욕했다. 종기 부분이 물에 불어 허옇게 되고 깊이 팬 속이 흉물로 드러나 보였다. 목욕을 마치고 바로 약방에서 종기 치료에 필요한 약, 반창고, 붕대를 사서 바르고 처맸다. 이 정도로만 해도 살 것만 같았다.

   이번 면회 2박 3일, 특별한 외박에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절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목욕탕에 같이 들어가 등을 밀어주었다. 아버지는 내 종기가 물에 헤어져 허옇고 벌겋게 속이 드러나 보이는 참상을 보고 쯧쯧 혀를 차시었다. 아버지는 속으로 뭔가를 원망하셨을까.

   그때 아버지와 함께한 특별한 이벤트를 지금은 공개할 수 있다. 내가 사진반 보직을 받지 못한 게 한이 돼 아버지께 그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고쳐지든 말든 뭐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처사에 대해서 항의든 호소든 해야 하겠다.” 하신다. 간소한 선물을 사서 부대 인사계 댁을 찾아갔다. 2박 3일 특별외박의 배려에 감사함을 전제한 뒤 사진반 보직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고 보직 변경을 요청했다. 그 인사계 상사는 “잘 알았다. 가능하면 고려하겠다.”라는 의례적인 대답밖에 하지 않았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헤어질 시간, 아버지가 내 곁을 떠나시고 나는 귀대했다. 돌아오는 길, 아버지의 그림자가 길 위에 길게 늘여져 보였다. 내게 가장 소중한 부정(父情), 그 마음을 그때 다음과 같이 담아 보았다.

 

邂逅 -아버지를 떠나보내면서-

 

청솔고개

 

아버지

어젯밤 서산머리에 애처러이 스러져 가는

초승달 속에 난 당신의 슬픔처럼 번지는

운명의 나래짓을 보았습니다.

 

어느 눈 내리는 밤

당신은 위대한 제후처럼 내게 와선

헐벗은 나그네처럼 말없이 떠나신 당신의 용자

호올로 영광스러웠던 젊은 시절의 위대한 회상이여

질곡과 같은 역사의 증인이여

폐허 위의 생명체외다

 

아버지

일찍이 당신이 남기신 발자국을 헤면서

오로지 회상 속에서 잔주름만큼이나 파란했던

당신의 모습

외려 初老의 곤혹함에 연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당신의 여린 아들은 뒤돌아 오열합니다

 

아버지

가없는 삶의 여정에서 한 줌의 흙이 되도록

힘없는 한 아름 포옹 속에서라도 끝없는 뜻을

머금은 당신의 모습

입술을 깨물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 당신의 사랑

아버지

당신의 분명히 내 생명의 原泉이었습니다

 

아버지

멀고 먼 南道에서 열흘이 하루가 되도록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방랑자처럼 헤매신

大地 위의 길과 길들

흑암처럼 깊은 눈보라 속에서도

얼어붙은 겨울 海邊 마른 파도를 뒤로하고

마침내

당신과 나의 만남은 운명인가 봅니다

당신과 나의 別離는 운명인가 봅니다

2025. 7.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