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이별하지 못하는 병, 버리지 못하는 병/아마 나의 미래에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을 얻을 게 없다는 또 다른 강박감 때문이 아닐까

청솔고개 2020. 7. 2. 22:24

이별하지 못하는 병, 버리지 못하는 병

 

                                                                                                  청솔고개

   

   우리의 삶은 어찌 보면 평생 이별의 준비로 이어지는 것 같다. 나는 최근에 들어 내 삶에서 커다란 두어 가지 헤어짐을 겪었다. 40년 가까이 몸담았던 교단을 떠남, 31년 살았던 옛집에서 이사, 향년 여든 여섯 어머니와의 영결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내외가 혼인해서 신접살림을 차리는데,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무슨 빵 공장 가건물을 방으로 개조한 것으로 조악하기 짝이 없었던 집이었다. 결국 거기서 연탄아궁이에 곤로 기름이 흘러서 한 번, 천정 누전으로 반경 한 발 정도 타들어가는 등 두 번 불이 날 뻔 했고, 우리의 첫 아이를 아내 뱃속에서 흘러버리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질리고 혼비백산한 나머지 이사를 단행했다. 다음 이사한 집은 2층이었는데 여름철에 이사를 했기 때문에 이층 옥상의 널찍함에만 반해서 겨울의 난방 상황을 거의 예측하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했었다. 아래층에서 연탄보일러로 난방 하는 구조인데 이층 방까지 그 온기가 전달될 리가 없었다. 쉽게 말하면 옥탑방 생활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온 겨울을 벌벌 떨면서 고생하다가 내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끝에 급기야 주인할아버지 있는 데서 목침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큰소리로 다투기까지 했다.

   그 다음 이사한 곳은 과수원 속에 붉은 벽돌을 붙인 그림같이 지은 단독주택이었다. 우리가 31년 동안 꿈같이 보냈던 옛집이다. 거기서 우리가 혼인한 지 5년 째 해에 우리 딸이, 6년 째 해에 아들을 얻었던 복 받은 집이었다. 이사하던 그해 봄에 시장에 가서 목련, 라일락, 살구나무, 감나무 묘목을 사서 심었다. 우리 아이들의 손가락만 했던 목련은 이제 줄잡아도 다섯 뼘 둘레의 거목으로 자랐다. 마치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듯이. 이제 그 집을 떠나 1년 전에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팔릴 예정이었던 그 집은 산다는 사람이 계약을 파기하는 바람에 빈집으로 남겨져 있었다. 처음엔 빨리 비워달라는 요구 때문에 내가 제법 아끼던 나의 자료들도 자료 평가 등급이 졸속 하향되어 그냥 파지로 실려 나갔었다. 그런데 그 계약 파기로, 한 달 안으로 비워 달라고 하던 그 요청이 없어짐에 따라 거의 일 년 동안 자료의 대 이동 작업이 잇따랐던 것이다. 나로 봐서는 자료를 선별하여 보존할 수 있는 시간을 그만큼 번 셈이었다. 솔직히 난 옛집을 이대로는 남한테 넘기고 싶지 않았다. 우리의 한 세대, 30여년의 가족 역사와 문화, 아니 삶 자체가 고스란히 배여 있는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존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되든 나중에 나의 개인 자료실로 남기고도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과거에 너무나 많은 나의 소중한 자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멸실 돼 버린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혼인 전 부모님과 같이 지낸 오랜 세월 동안 소중하고 아끼던 자료들이 잦은 셋방 이사로, 또는 나의 군 입대, 직장 등, 나의 부재로 챙기지 못해서 거의 다 없어져 버렸다. 지나고 보니 그게 그토록 아까웠다. 특히 나의 열 살까지가 고스란히 쌓여있던 안태고향 마을 집은 당시 개발독재정권의 보여주기 식 고속도로변 미화사업으로 강제 철거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루아침에 그 너른 성곽 같은 집을 버리고 아버지 어머니 사시는 시내 집의 좁아터진 단 칸 방으로 옮겨오실 수밖에 없으셨다. 그것도 내가 군에 입대 중이니 역시 나의 부재중 일어난 일이었다. 안태고향 집에 내 어린 시절의 모든 것들이 영원히 보존되리라고 여겼던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었던 생각이었다. 그 헐리고 남은 집터는 그 마을에 팔려나가서 그 후 마을 회관 건물이 들어서버렸다. 제대 후 옛 집터를 한 번 들렀을 때는 그냥 그 자리가 맨질맨질한 시멘트가 쳐 발린 곳으로 변해 있었다. 울창한 대밭, 대여섯 그루가 넘는 토종 대추나무와 감나무, ⁰꽤양나무, 감로나무, 우물 아래 미나리꽝은 물론이고 내가 장난감으로 굴리고 다니던 ¹동테바꾸, 타고 놀던 장난감구루마, 우물가의 연자방아, 널뛰기처럼 타고 놀던 디딜방아……. 이런 손때 묻고 추억 어린 것들에 이제 그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 시멘트 바닥 아래 영원히 매몰되어 파낼 수도 없어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한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31년 동안 살았던 그 집도 그 일 년 후 결국 팔렸다. 중개업자와의 인척 관계로 계약 파기한 사람에게는 법적인 조처도 못한 채 넘어 간 셈이다. 어느 날 그 근처를 지나다 보니, 31년 우리 집 역시 헐리고 집터는 뒷집의 주차장으로 말끔히 정비돼 있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엔 단층집에 이사해서 살다가 이층집을 증축할 때 일층 벽에 세워진 증축용 비계가 어지럽게 묶여져 있었던 당시 공사현장 사진을 보면서 비감에 젖을 뿐이었다.‘천만 송이 하얀 등불’이라고 내가 명명했던 백목련도, 고목에 가까운 라일락도 자취마저 없어졌다. 그래도 그 전에 30년 묵은 동백나무는 선산 묘원으로, 20년 쯤 된 영산홍은 큰집으로 옮겨 심은 게 그나마 지금의 이런 상실감, 허무적멸의 느낌을 조금은 줄여주는 선제적 행동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1년이라는 유예 기간이 있어서 처분하고 남은 것 중 중요 자료는 일단 보존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큰집의 깨어진 기와지붕 수리로 덮어 얹은 양철 지붕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간이 생긴 옥상에 옮겨 놓을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옮기는 일은 자료 보존이라는 안도감 앞에서는 고생도 아니었다.

   나의 이런 생각을 옆에서 지켜 본 아내는 큰 병이라고 혀를 끌끌 찬다. 그래서 정말 병인가 싶어서 책을 찾아보았더니,‘저장장애’란 항목이 있었다. 그 설명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저장장애는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언젠가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버려야 할 물건들을 집 안에 가득 쌓아두는 경우를 말한다. 어떤 물건이든지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계속 저장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증상이다. 모아 놓은 물건들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이고 자신의 회상물, 상징물, 애착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그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뭐라도 구질구질하다는 생각 하나로 함부로 내다버리는 것은 또 다른 병이 아닌가.

   그러면서 문득 법정스님의 ‘무소유(無所有)’정신을 떠올려본다. 버림으로써 공간이 생기고 거기에 더 가치 있는 것을 채워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소중한 가르침이다. 일찍이 나는 이 이치를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버리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고통스럽다. 아마 나의 미래에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을 얻을 게 없다는 또 다른 강박감 때문이 아닐까.

                                                                                                       2020. 6. 30.

[주(注)]

⁰꽤양나무 : ‘고염나무’의 토박이 말

¹동테바꾸 : ‘굴렁쇠’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