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단상 1
청솔고개
해마다 6월이 들면 나는 나의 마음이 이상하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짐을 감지한다.
특히 중순으로 접어 들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내 생애의 유월은 많은 극적인 이벤트로 이어져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6월이 깊어갈수록 풀어내고 싶은 내 이야기는 더 많아진다.
그 하나.
6월이 되면 보리가 다 익는다. 보리타작을 해야 하고 이어서 모심기를 한다. 예전 60년대에는 초중고 학교에서 가정실습이라는 게 있었다. 보리타작과 모내기 때를 농번기라고 했는데 그 농번기에는 대략 2~3일간 각자 자기 집에서 농사 일손을 도우라고 학교를 쉬는 제도다.
난 중학교 때부터 이게 제일 싫었다. 모내기도 싫었지만 보리 베기와 보리타작이 더 끔찍했다. 나는 학교에서 10시간이라도, 아니 밤을 세워가면서라도 공부하라고 했으면 했지 농사일은 못 거들 것 같았다. 공부가 훨씬 좋았다.
더워지는 날씨에 땀은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흔히 그 당시 표현으로 ‘콩죽같이 떨어지는 땀방울’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⁰보리까끄래기는 절은 땀에 몸 구석구석 꽉꽉 붙어서 보리밭에서 집에 올 때까지 떨어지지 않으니 따갑고 근지럽고 불쾌하기만 할 뿐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힘이 드니까, 반복되는 노동이니까 지겹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고랑 한고랑 보리 베기 하면서 머릿속에 떠올려 지는 것은 모두 부정적인 생각뿐이었다. 평생을 동반하는 나의 삼불(三不)의 화두(話頭)가 그때 생겨난 것 같다. 불안(不安), 부정(不淨), 불쾌(不快)의 감정, 기분의 덩어리 같은 거다. 즐거운 것이라기보다 떠올리기 싫은 것, 생각하기 싫은 것, 끔찍한 것만 이렇게 힘들고 지겨울 때만 골라서 내 의식 속으로 자꾸 강박적(强迫的)으로 떠올려진다는 것이다. 힘 듦, 지겨움, 트라우마 광경, 스스로에 대한 상상하기도 싫은 피해망상(被害妄想) 혹은 가해(加害) 망상 등을 포함한 죽음과 관련되는 그 무엇의 끊임없는 반복은 나의 건강한 정신세계를 갉아먹었던 것이다. 나약하게 하고 병들게 했던 것이다. 평생 나에게 잘못 습관화된 ¹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의 틀을 고착화하게 된 것이다.
나로 봐서는 문제의 심각성이 너무 컸던 것이다.
위의 나의 정신적인 위기 상황에 대한 촉발(觸發)요인은 다음 두 가지 사례였음을 나중 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내가 마음 들여다보기와 심리 상담을 공부하니 저절로 알게 된 것이었다.
그 하나는 중2때. 집과 학교 사이 통학로는 논길 밭길이었다. 어느 날 하교 때, 보리밭에서 내가 목격한 어떤 젊은이의 변사체에 대한 기억이다. 그 사체는 하얀 농구화를 신었는데, 걸친 옷이나 신발이 푹 꺼져 보일 정도로 훼손이 심해진 상태였었다. 내 생전 처음 인체의 육탈(肉脫)한 모습을 본 것이다.
6월 되고 누렇게 익은 보리밭만 생각하면 항상 자동적으로 그 광경이 떠올라서 너무 싫었다. 어떻게 그 기억만이라도 삭둑 잘라서 없애버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곤 하였다.
또 하나는 초등 5학년 때. 내가 사는 마을의 한길 갓집에 하룻밤 묵은 청춘남녀가 음독자살을 한 사건이다. 내가 우연히 그 곁을 지나가다가 경찰인지 보건소 직원인지 당시의 관계자들이 방에 죽어서 굳어 널브러져 있는 두 젊은 남녀의 발가벗은 시신을 검안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것도 6월로 기억이 된다.
나처럼 어린 나이에 시신 등 사건사고현장을 목격하도록 통제가 안 된, 그 당시의 허술한 관리 때문에 결국 나는 성장하면서 평생의 트라우마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정신적인 피해자가 된 셈이다. 보리밭의 변사체는 당연히 나 같은 어린 행인들이 못 보도록 조처를 했어야 했고, 젊은 남녀 주검 역시 검안 광경이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누구나 평생토록, 끔직한 그 무엇이나 상황을 한 번도 맞닥뜨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적어도 어린 아이들한테는 보이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결과의 귀책(歸責)이 그때 당국의 조처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결국 모든 건 나의 마음 밭의 건강성 문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나의 타고난 성향이나 경향성이 이미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유발(誘發)요인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촉발요인에도 결국 나는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인지된다.
내가 지금도 나의 삶의 목표를 ‘마음의 평화’로, ‘삼불화두(三不話頭)와의 동행(同行)’ 삼은 것이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注)]
⁰보리까끄래기 : ‘보리까락’의 토박이 말
¹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 :
<인간은 누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이상한 생각이 의식에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매우 음란하거나 잔인한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며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 거의 없는 일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은 잠시 우리의 의식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처럼 우연하게 떠오르는 불쾌한 생각이나 충동에 잘못 대처하게 되면 강박장애로 발전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 인지 행동적 입장을 지닌 심리학자인 Salkovskis(1985)는 강박장애가 발생하는 세부적인 과정을 분석하여 침투적 사고와 자동적 사고로 구분하였다. 침투적 사고(intrusive thoughts)는 우연히 의식 속에 떠오르는 원치 않는 불쾌한 생각을 의미하며 대부분의 사람이 흔히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침투적 사고는 일종의 내면적 자극으로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자동적 사고를 유발한다. 즉,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는 침투적 사고에 대한 사고를 말하는데 거의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매우 빨리 지나가며 잘 의식되지 않기 때문에 ‘자동적’ 사고라 부른다. 자동적 사고는 침투적 사고와는 달리 불편감을 느끼지 않는 자아동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 별다른 저항을 일으키지 않게 되며 결과적으로 강박사고가 지속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Salkovskis(1985)에 따르면, 침투적 사고 자체가 강박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침투적 사고의 속성을 왜곡하는 자동적 사고가 불안과 강박행동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강박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침투적 사고를 과도하게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중요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고에 대한 책임감과 통제 필요성을 강렬하게 느낀다. 예컨대, 가족과의 성관계를 맺는 근친상간적인 침투적 사고가 우연히 떠올랐을 때, “이런 생각은 중요하므로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비윤리적 생각을 한 것은 나의 책임이다.”, “이런 생각이 절대 떠오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라는 자동적 사고를 하게 된다. 따라서 이처럼 불안을 유발하는 침투적 사고를 억제하거나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노력은 오히려 침투적 사고가 자꾸 의식에 떠오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권석만이 지은 '현대이상심리학 ' 200-201쪽에서 인용함]
2020. 6.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