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 살 전후사(前後史)3, 소몰이꾼들의 통과의례
청솔고개
소 먹이러 산에까지 갔는데, 샌날이어서 못에 멱 감으러 들어갈 수 없는 날이면 동네 형뻘 친구들이 노닥거리는 행태는 대개 이렇다. 너무 심심하니 놀이나 게임처럼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일을 벌이는 거다.
먼저 송기(松肌)막대기로 하는 전쟁놀이다. 긴긴 봄날 한창 소나무에 물오를 때에 손가락 두 개 합친 것 만한 크기의 소나무 가지를 뚝뚝 자른다. 겉껍질을 벗겨내면 보드랍고 달짝지근하여 솔 향이 솔솔 나는 속은 물이 줄줄 흐르도록 하모니카 불 듯이 벗겨먹는다. 이 속 껍질을 송기라고 한다. 그 향과 식감이 아직 내 입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벗겨 먹고 남은 소나무 잔가지들은 산에 아무데나 버려진다. 봄날 내내 여름까지 말라서 몹시 가볍다. 편을 갈라서 그럴 듯한 룰을 정해서 이걸 막 던지면서 많이 던진 숫자를 세어서 승패를 정하는 게임이다. 공격과 방어의 행태가 제법 과격한 게임이다. 더러 심하게 다치기도 하지만 정말 정신없이 빠지게 되는 놀이다. 요즘도 가끔 소나무의 속껍질로 만든 송기떡을 만나게 된다. 그 솔 향이 참 반갑다. 반색을 한다. 그런데 먹어보면 이게 그렇게 맛있었던 떡이었던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떡이 재료인 송기도 구하기 힘들고 나무껍질의 일종인 송기를 부드럽게 해야 하므로 만들기도 까다롭기 짝이 없었던 당시의 송기떡은 잔치나 큰일에서 내 놓는 귀한 음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알아보니 구황식품이라니…….
다음은 후배들 싸움 붙이기다. 서로 후배들에게 다가가서 귓속말로, “점마가 니 이긴다 카더라. 니는 지한테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 카더라. 니한테만 이야기해 주는데 니 가마있나?” 이렇게 부추기고 이간질하면 순진한 우리들은 금세 씩씩거리고 분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싸움은 시작된다. 나도 이 못되고 기막힌 농간에 순진하게 몇 차례 말려 들어서 풀밭에서 서로 엉겨 붙어 나뒹굴었던 기억이 있다. 상대도 나와 비슷한 체격이거나 좀 만만해 보여서 자신감도 생겨났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자존심이나 승부욕에 묘한 불을 붙인 격이다. 지금 생각하니 참 소심했던 내게는 이 특별한 행위가 승부에 대한 도전이나 모험을 제대로 경험하는 계기가 된 같다. 특별한 용기나, 자존심, 자신감 같은 것을 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이나 잣대로 들이대면 분명한 ‘싸움 붙이기’다. 형뻘이나 나와 나의 파트너 싸움꾼 모두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문제의 장본인이다. 좀 무섭게 말하면 폭력, 폭행 방조 내지 사주 행위 같은 것. 그런데 내가 지금 그 때로 돌아가서 다시 그런 경우를 맞닥뜨린다고 해도 싸움을 붙인 마을 형뻘을 탄핵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이로 보아, 지나간 모든 일들은 어쨌든 일정 부분 미화되거나 포장되어 재해석된다는 가설이 맞는 걸까?
오늘날 열 살 먹은 아들이 누구의 부추김으로 싸움질을 해서 코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졌다면 그 부모가 어떤 태도를 취할까? 답은 명약관화한 것. 요즘 흔히 ‘학폭’이라고 줄여서 말하는 학교폭력위원회에 사안이 회부되고, 학교에서는 관련 기관에 보고하고……. 아무리 미화하고 인생 의미처럼 부여한다 하더라도 폭력, 폭행의 ‘폭’자만 들어도 용납이 될 수 없는 오늘날의 세태인 것이다. 그 형뻘들의 인식을 지금 와서 해석해 보면 이럴 것 같다.
‘참 심심하다. 오늘 뭐 재미있는 거 없나? 그렇지. 오늘은 요 두 녀석들을 꼬셔서 싸움 붙여서 재미있는 구경 좀 해야지.’ 이 싸움질은 복싱, 유도, 레슬링의 종합 격투기 대련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링도 없고 룰도 없고 그냥 그 마을 형뻘이 심판이 되어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재밌는 격투기 한 편을 현장에서 연출하고 그걸 즐기는 셈이 되는 것이다. 싸움은 대개 승패가 불확실하게 끝나는데, 그러나 코피가 먼저 터지는 아이가 결국은 지는 셈이 된다. 자주 대련을 붙다 보니 나중에는 나도 꾀가 생겨 상대방 코를 집중 공략하려던 게 생각나서 씁쓸하고 야릇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기 코피 흐르는 것만 보면 심리적으로 벌써 위축되고 경기는 쉽게 끝나는 것이다.
내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린 시절의 용기를 기를 수 있었고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의미가 있다고 하면 오늘날의 젊은 부모들은 이해할까? 긴긴 여름날 오후, 우리들 소몰이꾼들의 하루는 이렇게 나날이 거창한 통과의례로 저문다. 2020.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