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늦여름 10일간의 작별/미 동부 및 캐나다 동부 기행보고서 7
청솔고개
2003. 8. 20. 수 [여섯째 날 후편]
오전 8시 20분에 ‘GOUVERNEUR[구베르너]’라 이름 지어진 호텔을 떠나 퀘벡으로 향발했다.
퀘벡 주는 한반도 면적의 7배나 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물론 주 면적의 거의 대부분은 북극연안이라서 소용이 닿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식사 후 좀 늦게 차에 올랐더니만 맨 뒷좌석에 혼자 앉게 되었다. 그래 혼자 이렇게 떠나 보는 것도 괜찮아 하면서도 잠시라도 아내와 동석하지 못함이 좀 불안한 느낌도 들었다.
10시경 드디어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인트로렌스 강의 다리를 건너 유서 깊은 불란서 풍의 도시에 안착했다. 우선 옛 성의 입구에 내려서 볼 일을 보고 성채 옆으로 난 나무 계단으로 된 다리를 건너 멀리 바다처럼 넓어진 강을 보면서 이제 내가 와본데 중 가장 위도가 높은 북미 대륙 캐나다의 정취를 마음껏 호흡하고 있었다. 강은 아름다웠다. 절경이었다. 아내와 손잡고 이 강변을 거닌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 맹세를 하였던 너와 내가 아닌가?”라는 노랫말도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우리 내외가 이렇게 먼 이역에서 손잡고 아름다운 북미의 풍광을 조망할 수 있을까하는 두렵고 아쉬운 생각마저도 든다. 흔히 가장 아름답고 찬연할 때, 가장 절정에 이르렀을 때, 행복감에 최고조로 도취해 있을 때, 뭔가 좋지 않은 게 낀다고 선현들은 경계를 권면했었지만 이렇게 너무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되면 이 행복감이 곧 바람에 실려가 버릴 것 같은 불안감도 없지 않아서 있을 법하다.
오전10시 45분까지 샤토프론트낙[Fairmont Le Château Frontenac] 호텔 앞 동상에 모였다. 넓디넓은 광장에는 거리 악사들이 음악을 들려주고 있고 세인트로렌스 강에서 불어오는 미풍에 아름다운 선율이 늦은 8월의 북미 광활한 대륙에 나부끼고 있다. 광장을 거니는 여행객과 산책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풍부했다. 평화와 온순함이 넘쳐흐른다. 여유 있고 광활한 자연 환경과 자원이 그들의 표정을 그렇게 만들고 있는가 보다. 지형적으로나 국제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가 아닌가. 또 이 나라는 건국 이래 끔찍한 전쟁을 체험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적어도 우리처럼 동족을 상잔하는 비극은 없었지 않았는가. 서방을 여행하면서 그들에게 느끼는 공통점이 바로 이러한 풍부한 표정이다. 정말 부럽다.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이들의 풍부한 표정과 친절한 매너는 받아드리고 싶다. 쉽지는 않겠지만. 좁은 국토면적에서 발버둥 치듯 경쟁하는 우리로서는 그림의 떡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치열한 경쟁 체제 때문에 우리 또한 이만큼 딛고 올라 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꿈같은 상황을 접어 둔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올드 퀘벡의 다름 광장, 프티샹플랭 거리 [Rue du Petit-Champlain]를 산책한다. 제2의 파리라는 별명이 있는 이곳의 풍정은 독특하다. 300년 전의 성곽 내 생활을 재현해 놓은 거대한 벽화, 마술, 차력, 연주 등을 직업으로 하는 거리의 예술가(?)들, 화려한 여름 꽃으로 장식된 건물의 베란다와 발코니 창틀, 마치 동화 속의 궁전을 방문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일본인 거리악사가 한국의 아리랑을 연주한다. 우리가 어떻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빨리 알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광장으로 접어들면서 맨 처음 맞닥뜨린 모습은 가이드가 한국 국적의 아가씨라고 설명하는 한 거리의 악사를 만났는데 우리의 가곡을 연주하였다. 그런데 우리말은 전혀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그냥 대꾸하기 싫어서 인지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마 이곳으로 입양한 한국의 딸이 아닐까 하고 내 나름대로의 사연을 추측해 본다. 연주들을 들었으면 관람료를 내어야 하는데 나도 그렇지만 우리 사람들은 이것에도 익숙지 않아서 좀 곤혹스러운 때가 있다. ‘내야 되나? 말아도 되나?’ 별것 아닌 것이 고민이 된다. 이 역시 극복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오전 11시 45분 모두 모여서 근처 붉은 색으로 칠해진 독특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치킨, 스파게티 중, 하나를 골라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 바로 옆 골목에는 거리에 소품 그림들이 전시되어있고 곳곳이 난전에는 초상화, 캐리캐처 그리는 사람들이 여행객들을 상대로 분주하게 손놀림을 하고 있다. 우리 일행 중에서는 주로 초등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어른을 졸라서 그리곤 했었다.
오후 1시 10분에 이 광장을 떠났다.
그렇다. 여행이란 거리와 광장, 길과 강, 산과 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 다름 광장은 꿈과 낭만이 넘친다. 오랫동안 늦여름 이 광장의 풍정을 기억할 것이다. 아쉬움을 남기면서 20번 국도를 타고 일로 남진하였다. 상행은 40번으로 이정표에 나타나 있다. 한참동안 세인트로렌스 강변을 왼쪽으로 끼고 달리더니 큰 다리를 건너서 한참 지나면서 이 환상적인 강과도 영결종천(永訣終天)하였다. 이 강은 11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는 얼어서 배가 다니지 못하며 눈도 평균 50cm 정도 쌓인다고 했다.
오후 2시 55분에 Dromonvillie라는 곳에서 왼쪽으로 틀어서 미국 국경이 있는 리치몬드로 향했다.
오후 4시 35분에 캐나다-미국 국경에 도착하였다.
호텔 아침식사 때 간식용으로 넣어온 과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가이드는 미리 알고 국경 통과 시 농산물 반입을 금지하는 규정에 적발되지 않기 위해서 과일파티를 열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휴게소 잔디밭에서 과일 먹어치우기에 돌입했는데 왠지 나는 같이 어울리지 못할 씁쓸함이 있었다. 30년, 40년 전이면 몰라도 제법 먹고 살만한 우리가 이곳까지 와서 뷔페식 호텔 아침 식사에 나오는 과일들을 가방에 숨겨 나온다면 작은 규정이지만 위반하는 것이 된다. 국제적 위신이 어떻게 되나. 호텔 측에서도 모를 리는 없겠고 그런데도 묵인해주는 것 같은데 마음이 영 개운찮다. 지니고 온 과일을 모아 놓으니 정말 파티를 벌일 만큼 한바탕이었다. 먹고도 남은 오렌지 3개가 있어서 도로 가져가려고 하는 아내를 설득해서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했다. 우리도 좀 품격 있는 세계시민이 되기를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창한 생각도 해본다. 이런 저런 상황이 게 제법 오랜 시간동안 멍한 기분을 이겨낼 수 없었다. 여행의 심리적 후유증이 벌써 나타나는가. 아니면 행려자의 고난과 낭만을 만끽하고 있는가.
기름을 주유하고 좀 더 가서 4시 55분에 국경 면세점에 들렀다.
방문 기념품을 구입할 때다. 매플 캔디와 시럽을 좀 샀다. 그리고 그동안 찾아 마지않았던 북미 대륙 전체와 부분이 잘 나와 있는 지도도 구입했다.
오후 5시 30분에 국경 이민국에 도착하였다.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 5시 50분에 아메리카 합중국의 국경을 넘었다.
다시 아메리카 합중국이다. 더욱더 잘 가꾸어진 삼림지대가 우리를 다시 맞이한다. 암만 보아도 이러한 풍요로운 풍정은 나를 절망하게 한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 광활한 골프장, 침엽수림이 짙은 그늘을 이루고 있는 천연 호수,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지대, 지평선까지 아득하게 이어진 삼림지대에 석양이 물들어 간다. 91번 도로에서 존스버리시를 지나 93번 도로로 접어들었다. 멋진 스키장이 즐비한 버몬트 주에서 뉴햄프셔 주로 내려오면서 화이트마운틴 산맥 자락을 지나면서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의 소설의 배경 조형물인 “큰 바위 얼굴”의 현장을 기대했었는데 지난 5월 3일 극심한 풍화작용으로 바위가 뭉개져서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뉴햄프셔 주에서는 차의 번호판 문양을 큰 바위 얼굴로 할 정도로 주민들의 애착심이 강하였었는데 이런 불상사로 그 실망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것 같다. 부자, 군인, 정치가, 시인 등으로 기대되던 이 지역의 전설이 소설로 꾸며지기라도 한 것인가.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의 엔도버(Andover)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10시 30분. 여기서 벌써 한 시간 전에 “레인보우”라는 중국식 뷔페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고서였다. 여기서 매사추세츠 주, 로드아일랜드 주까지를 흔히 미국의 북동부인 뉴잉글랜드 지역인데 과거 영국 식민지라는 아픈 역사가 어려 있는 곳이다. 특히 뉴햄프셔 주는 조선인 최초의 유학생으로 <서유견문(西遊見聞)>의 저자 유길준선생의 자취가 어린 곳으로 곧 기념관이 완성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 세기도 더 뒤에 이곳을 유람(遊覽)하면서 나의 '新西遊見聞'이라도 꾸며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0. 8.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