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뉴질랜드 기행 보고서/ 제5일, 오전, 뉴질랜드 남섬 클라이스트 처치, 켄터베리 대평원, 푸카키 호수, 2016. 9. 26. 월
청솔고개
오늘은 여행 5일째, 뉴질랜드 여행 첫날. 여기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에서 다시 더 남쪽인 퀸스타운 가는 여정이다.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는 4년 전 진도 7.2의 지진 지대. 가이드가 차로 지나가면서 그 폐허 현장을 설명 주었는데 집중하지 못해서 제대로 못 보았다.
버스로 퀸스타운으로 이동하는 이 지역은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가 보전되어 있는 켄터베리 대평원이다. 뉴질랜드 남섬 특유의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고 일정에 안내되어 있다. 과연 끝없이 펼쳐지는 초지, 드문드문 집이 보이는데 언덕 위의 집일수록 집값이 더 많이 나간다고 한다. 산에 나무가 없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지역의 토양 바로 밑은 전부 바위라서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이렇게 쉽게 천혜의 초지가 지천으로 조성될 수 있었다고 했다. 토양에도 무슨 특별한 성분이 있어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 초봄 날씨, 흐린 새 봄날 여행길이다. 많은 나무들이 아직 움조차 트지 않은 것 같다. 다만 계곡 근처에는 이제 막 잎을 틔운 수양버들잎들의 선연한 연두색만이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흐릿한 창 너머 광활한 초원에는 양떼와 젖소 떼들이 휙휙 지나간다. 워낙 넓고 먼 곳 초지에 꼬물거리고 있는 양떼들을 가이드는 꼭 징그럽게도 구더기 같다고 표현한다. 좀 심한 표현이다. 좀 부푼 쌀알 뿌려 놓은 것 같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여기로 보면 지금이 이른 봄날, 거의 한 달 전에 태어난 어린 양들 두세 마리가 어미 양 옆에서 나뒹굴면서 재롱을 부리거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은 파라다이스 그 자체였다. 아니 평화 그 자체다.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내 생애, 아니 생전에, 언제 다시 이런 모습을 볼 수나 있을까? 그만 이런 생각을 하면 아득해진다. 이생에서는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을 나는 그냥, 막, 휙휙, 아무생각도 없는 듯이 지나가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09:07, 마을 공동묘지라고 설명하는 지역을 지나간다. 역시 파릇한 봄 풀밭. 그냥 봄풀이 아니라 드넓은 봄풀의 파도다. 풀밭 사이로 깍두기처럼 자른 경계용 나무울타리가 인상적이다.
봄비는 계속 내린다. 군데군데 초지에 물을 공급하는 스프링클러의 일종인 관개용 파이프로 설치한 구조물이 거대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긴 것은 1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폭 넓고 얕은 시내에는 눈 녹은 맑은 물이 졸졸 소리 내며 흐르고 있다. 도로는 중앙 분리대도 없고, 도로 안내표지판도 최소화돼 있다. 아마 자연을 살리려는 취지에다 인구도 희소하고 교통량도 적어서 필요 없을 것 같다. 끝도 없는 직선도로가 한없이 이어져 있다.
차가 너무 휙휙 지나가는 바람에 아직 양떼, 소떼들의 영상을 좀처럼 담기 힘들었다. 찍으면 그냥 바람처럼, 그림자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흐려지는 영상이다. 흐린 하늘 밑 지평선이 숨어버린 곳이 이어진다. 차 안은 히터 기운으로 온기가 가득하고 습기로 좀 눅눅하다. 대다수의 여행객은 엊저녁의 무리한 여정을 소화하지 못해 잠에 골아떨어진 듯하다. 자그마한 마을을 지나고 있다. 낯선 곳이지만 정겹다. 아담한 꽃밭에는 튤립이 꽃봉오리들을 이고 있다. 낡은 기차가 서서 비를 축축히 맞고 있다. 이름 모를 꽃들이 지천이다. 지금은 뉴질랜드의 꽃샘추위 시기다. 큰 낙엽교목들은 아직 벌거벗고 있다. 이들에겐 아직 겨울이다.
쭉 직진하다가 09:45경 우회전해서 다른 차로로 접어든다. 더욱더 광활한 초지가 전개된다. 갑자기 초지 울타리용 키 큰 나무들이 앞을 가린다. 이런 조림은 계속 조성되어 있다. 아직 잎을 틔우지 않아 거무스름한 미루나무 숲이 군데군데 열병식하는 군인처럼 일렬로 서 있다. 오늘 봄비 내리는 뉴질랜드 남섬의 이런 아침 정경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아주 인상적이다. 차에서는 특이하게 제한 속도 초과 경보음이 간간히 울린다. 차창은 역광의 더운 입김에 뿌옇게 흐려져 있고 그저 황야의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비는 오는데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커피 점에 들러서 잠시 망중한을 즐겼다. 이른 봄 찬비에 몸과 마음이 잔뜩 움츠려져 있는데 뜨거운 커피는 바로 힐링이다. 나는 절대로 잠자지 않고 이 장엄한 대자연의 축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또한번 다짐했다.
드디어 켄터베리 대평원은 지나고 이어서 빙하가 만들어낸 에메랄드 빛 푸카키 호수 옆 식당에 점심 먹으러 들렀다. 날이 흐려서 기대했던 맑고 투명한 옥색 호수 물빛은 볼 수 없었다. 아쉽다. 멀리 세계적인 등반가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 산 정복을 위해 훈련했다는 3,754미터의 마운틴쿡 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가이드는 흐려서 구름이 잔뜩 끼어서 지금 못 보 게 되어 너무 아쉽다고 한다. 그리고 몇 번이나 이곳을 되돌아 올 때 다시 들른다고 강조한다. 가이드의 마음을 다 그러할 것이다. 방문객이 좋은 풍광을 제대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안타까운 것은 인지상정 아닐까.
점심 식사는 피시 앤 칩스, 즉 생선 요리다. 우리 팀이 와인을 몇 병을 구입해서 같은 버스 동승자 모두들에게 한 잔씩 대접했다. 이를 보고 가이드가 무척 감동한 듯 추켜세운다. 가이드는 '어찌 피시에 와인을 즐길, 정말 멋진 최고의 생각을 다 하셨는가'하면서. 식사 후 호수 근처까지 가서 이역에서 초봄의 풍광을 담았다. 멀리 미루나무와 수양버들 잎 색깔이 흐린 호수에 부드럽게 비친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 풍광은 가치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옛 경국지색이라해서 항상 생글생글, 혹은 환한 웃음만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미인이면 그 눈물짓는 얼굴, 흐려 어두운 얼굴도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2020. 10. 16.
'여정(旅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주 뉴질랜드 기행 보고서/제6일, 오전,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사운드 가는 길, 거울 호수, 호머터널, 2016. 9. 27. 화 (0) |
2020.10.24 |
호주 뉴질랜드 기행 보고서/제5일, 오후, 뉴질랜드 남섬 크롬웰, 퀸즈타운, 와카티푸 호수, 테아나우 숙소, 2016. 9. 26. 월 (0) |
2020.10.23 |
호주 뉴질랜드 기행보고서/ 제4일, 블루마운틴, 시드니 공항, 뉴질랜드 클라이스트 처치 공항, 2016. 9. 25. 일 (0) |
2020.10.17 |
호주 뉴질랜드 기행 보고서/제3일, 오후, 시드니크루즈코스, 오페라 하우스, 하버브리지, 시드니 시라이프 아쿠아리움, 미세스 맥콰리 포인트, 2016. 9. 24. 토 (0) |
2020.10.08 |
호주 뉴질랜드 기행보고서/제3일, 오전, 호주 시드니, 맨리 비치, 노스헤드 전망대, 더들리페이지, 갭팍, 본다이비치, 2016. 9. 24. 토 (0) |
2020.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