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가
청솔고개
홀로 됨은 결코 욕되지 않음이니
갈 길이 바빠 발걸음 재촉하여도
닿을 때 없는 이 몸이랴
바람처럼 나를까
들처럼 주저앉으랴
설목 사이로 빤히
불빛 새어나와도
내 눈에 뵈지 않고
언덕 넘어 어디엔가
그대 그대 음성처럼 뜨거운
종소리 들려도 들려도
내겐 들리지 않음에랴
가다가 가다가
어디론지 가다가
굶주린 이리 떼 만나면 이리 밥이 되고
이리야 이리야
내 뜨거운 피 한 방울
내 붉은 심장 한 점이라도
솜털처럼 하얀
눈물에나 씻어나 주렴 씻어나 주렴
가다가 가다가
어디론지 가다가
설원으로 가없이 난
세상 저쪽 길 가다가도
배고픈 까마귀 떼 만나거든
까막아 까막아
내 눈이나 파먹으렴
맛있는 내 눈이나 파먹으렴
홀로 가는 길이라 결코 약하지 않음이니
내게 위로 받게 할 사람
그 누구와도 동행하지 않음이니
결코 서럽지 않음이니
가다가 가다가
절벽을 만나면
절벽이나 되어 버리고
마애관음이나 되어 버리고
가다가 가다가
바람을 만나면
닿을 데 없는 이 몸이랴
바람처럼 나르랴
바람이나 될까나
어이하리오 어이하리오
길가다가 밤을 만나면
밤에 흐르는 은하를 만나면
은하나 될꺼나
흐르는 은하나 될꺼나
[1980. 12. 17 새벽]
2020. 1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