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겨울잠 든 개구리처럼 칩거했다
청솔고개
오후 늦게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려니 또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린다.
이렇게 겨울밤이 깊어가니 문득 어린 시절이 또 불현 듯 떠오른다. 미칠 듯이 그립다.
이 나이가 되면 현재는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 같아 특별히 이야깃거리가 없고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니 섬광처럼 스쳐지나갔거나 무지개처럼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만 자꾸 떠오른다. 어린 시절하면 또 우리 엄마, ‘아부지’가 생각난다. ‘아, 우리 아부지!’, 내게는 나의 친구 같으셨고 나의 형님 같으셨던 아버지다.
이런 처연한 마음을 달래려고 캔 맥주 한 잔 했다. 더욱 비감해진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 옛 노래에 빠지게 된다. 옛 노래를 디딤돌로 해서 옛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다. 내 마음 달래려고 캔 맥주 한 잔 했다. 더욱 슬퍼진다.
한번은 촌에서 성내(城內) 극장에 아버지와 같이 간 기억이 떠오른다. 국민 학교 다닐 때 같은데 아버지와 극장가기는 처음인 듯하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흑백인지 총천연색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한 영화의 장면이 펼쳐진다. 머리를 흩뜨린 주인공 여자가 혼자 끝없이 펼쳐진 눈밭을 쓰러지면서 걸어가면서 하염없이 슬픈 목소리로 무슨 노래를 불렀던 장면이 늘 뇌리에 각인돼 평생 잊어지지 않았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무슨 연유가 있어서 저 여인은 저리 처절히 몸부림칠까? 삶이란 저리도 힘드는 것일까? 목소리만 빌려서 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그 영화의 주제곡을 부르는 장면인 것 같았다.
그 장면과 그 때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꽂힌 한 노래가 있다. 며칠 전부터 나의 유 튜브 옛 노래 서핑 벽이 또 도져서 찾아낸 영상이 있다. 아주 젊은 여자 가수가 새로운 감각과 독특한 음색으로 다시 불렀는데 참 반가웠다. 이 영상을 보면서 반세기도 더 전에 유행했던 노래의 감성을 어떻게 이렇게 잘 되살리는지 놀랍다.
그 영화의 제목은 60년대 개봉한 ‘열풍(熱風)’이고 그 주제가가 “울어라 열풍아”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참 무뚝뚝하시고 가부장 역에 아주 충실한 분이셨는데 술 한 잔 들어가시면 콧노래로, 아니면 피아노로 이 노래를 즐겨 연주하시던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선연하다.
이제 감옥보다 더 깊이 폐쇄된 병원에 계시면서 즐겨하시던 한 잔 술도 못하시고, 취흥을 건반에다 호소하시지도 못하시니 내 가슴이 더 답답하다. 아버지가 평생 즐겨 부르시던 이 노래를 내가 혼자 나직이 흥얼거려본다. 아버지를 참 그리워하면서.
아버지는 언제 그리도 한번 가고싶어 하시던 집에서 이 노래를 한 번이라도 연주해 보실 수는 있을는지, 과연 그날은 올는지. 이 세월에는 기약이 없다.
울어라 열풍아/ 이미자 노래
못 견디게 괴로워도 울지 못하고
가는 님을 웃음으로 보내는 마음
그 누구가 알아주나 기막힌 내 사랑을
울어라 열풍아 밤이 새도록
님을 보낸 아쉬움에 흐느끼면서
하염없이 헤매 도는 서러운 밤길
내 가슴의 이 상처를 그 누가 달래주리
울어라 열풍아 밤이 새도록 2020.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