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旅情)

윈난[운남, 云南]의 산채에 걸린 구름, 샹그릴라[香格里拉] 방랑기 4, '리장'[여강, 丽江]/그 강 너머로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고 거긴 매화꽃이 만발해 있다. 그 뒤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숲, 설산..

청솔고개 2021. 1. 24. 02:15

윈난[운남, 云南]의 산채에 걸린 구름, 샹그릴라[香格里拉] 방랑기 4, '리장'[여강, 丽江]

                                                                                         청솔고개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 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니 거리가 한적하고 조용하다. 마치 어떤 성소(聖所)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엷은 아침 햇살이 풀 한포기 없어 보이는 사막 같은 고산의 산록을 쓰다듬고 있는 듯하다. 오늘은 또 여기를 떠나야 한다. 여행 기간 동안 내내 따라다니는 불쾌한 기억이 나를 참 힘들게 한다. 언제 과연 이런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 3,600미터에서 거의 2,000미터 더 낮게 내려간다. 여강에서 온 길을 그대로 거슬러 내려간다. 좀 아쉽다. 이번 여행에서 나의 목적은 ‘샹그릴라(香格里拉). 샹그릴라는 과연 존재하는가, 있으면 어디인가. 내가 살 수는 있는가’인데 이렇게 스치듯 떠나 가버리니 참 아쉽다. 장족 마을, 이족 마을을 되돌아오면서 늘 히말라야 산맥의 동쪽 끝자락인 설산들이 같이 따라오는 것 같았다.

   대문이나 창문에 세심하고 곱게 단청 같은 무늬를 장식한 장족 집들이 끝나 갈 무렵 가이드는 이곳이 전망 좋은 곳이라 하였다. 화장실 볼일도 보고 경치도 구경할 겸 잠시 정차했다. 가까이는 계단식 밭, 그 밭에 간간히 보이는 가축 떼, 그 뒤로는 짙은 침엽수림의 광대무변한 고산지대는 한결같이 더 멀리로 흰 눈썹이나 백발 같은 설산들을 이고 있다. 햇볕은 포근하고 날씨는 더없이 쾌청하였다. 드디어 이족 마을에 들어섰다. 집들은 꼭 한국 강원도의 너와집 같은 방식이나 기와를 이고 있었다. 이족들은 좀 거칠어서 잘못 다루면 많이 힘들어진다고 말했다. 어지간한 곳이라도 다 전기를 설치해주는 등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을 위하여 많이 신경을 쓴다고 한다.

   여강에 거의 다 오자 금사강의 강폭은 더욱 넓어지고 푸르러진다. 여긴 벌써 봄이 온 듯, 매화가 피어 꽃밭을 이루고 배꽃인지 살구꽃인지 흰 꽃이 군데군데 보인다. 장강의 상류인 금사강의 모래는 참 보드랍고 하얗게 보였다. 안내서에 소개되어 있는 장강제일만은 그냥 차에서 스쳐보았는데 제대로 보지 못해서 아쉽다.

   그 강 너머로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고 거긴 매화꽃이 만발해 있다. 그 뒤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숲, 설산 연봉이다. 그 뒤로는 엊그제 때 올랐던 옥룡설산의 윗부분이 더욱 또렷이 드러나보인다.  여기가 바로 내가 꿈꾸고 찾던 샹그릴라가 아닌가. 바로 뒤 자리에 앉아서 이것저것 여행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50년생 ㅊㅎㄱ씨하고는 좀 가까워진 것 같다. ㅊ씨는 이곳이 마치 봄을 맞이하는 한국의 섬진강 가를 달리는 기분 같다고 했는데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ㅊ씨는 일본의 한 여행 작가가 쓴 책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는 앞으로 일 년에 딱 두 번은 반드시 해외여행을 하겠다는 약속을 자기 아내한테 한 걸 읽고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삶의 방향과 철학을 잘 보여주는 깊이 있는 이야기 같다. 저 너머 5,000미터 급 설산은 그러면 지리산 쯤 되는가. 이 풍광이 정말 좋아 몇 장이고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여강에 도착하자마자 흑룡담(黑龍潭)을 찾았다. 자그마한 연못인데 멀리 옥룡설산이 멋진 배경을 하고 있다. 날이 맑고 바람이 없으면 저 옥룡설산의 그림자가 여기 연못에 비쳐 절경을 이루며 이 모습은 윈난성의 대표 풍광으로도 소개된다고 했다. 오늘은 날이 참 포근하고 기분도 좋다.

   이어서 유네스코복합문화유산인 여강 고성을 보기 위해서 고성 안에 있는 전통 식당 ‘홍루빈관(紅樓賓館)’에 들러서 점심을 먹었다. 안내 표지석은 나시족 동파 문자로도 씌어져 있다. 식당 나무 창살을 통해서 보이는 골목 풍경이 아주 정다워 몇 컷 했다. 일행 중 늘 술을 즐기는 내 또래 여행객이 항상 술병을 내 놓는다. 오늘은 내가 그 여행객 앞서 준비해간 술을 내 놓았다. 그 여행객도 플라스틱 병에 든 소주를 내 놓아서 한 잔씩 대작했다. 낮술을 마시니 얼굴은 화끈거렸지만 기분은 고조된다.

   여강고성은 그 명성만큼이나 의미 있어 보이지 않았다. 고성은 없고 고대 주거 환경을 세트로 한 거대한 쇼핑센터 같다. 아니 그냥 시장판이다. 그래도 골목마다 활기찬 여행객의 표정을 보거나 전통 복장을 하고 말을 타고 손님을 유치하려는 나시족 남녀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분위기와 기분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다가 길 가 수로를 따라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옆으로 벌써 수양버들 연푸른빛이 걸려 있는 즐비한 홍등과 잘 어울린다. 가장 중국다운 이국정취에 젖을 수 있었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울려 나오는 중국 전통음악의 특유한 음률이 이제는 좀 친숙해진다.

   그런데 아내가 몹시 힘들어 한다. 몇 골목 다녀보더니만 그냥 털썩 주저앉는다. 어제 고산증으로 잠을 심하게 설치고 계속되는 설사로 체력이 많이 소진된 것 같다. 그러니 구경이고 뭐고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나는 아내한테 양해를 얻고 몇 군데 돌아다니면서 동영상도 담아 보았다. 중국 전통음악은 애조 띤 게 많은데 한 골목에서 어떤 처녀가 상점 안에서 부르는 노래를 담고 싶어서 동영상을 찍어도 보았다. 수정 같이 맑은 물이 마을 안쪽으로 끊임없이 흐른다. 돌다리 위에 마침 웨딩 사진을 촬영하러 나온 나시족 신부가 예쁜 자태로 앉아 있다. 얼굴은 담지 못해서 아쉬웠다.

   이어서 근처 유명한 보이차 찻집으로 갔다. 안내원의 설명이 있은 후 몇 차례 보이차를 마셔보았다. 피로회복 두통에 좋을 것 같아서였다. 동행친구는 전에 마셔본 중국 보이차의 효능을 많이 보았다면서 제법 많이 구입한다.

   바로 여강공항으로 갔다. 수더분하고 성실해 보이던 여강 가이드와는 작별이다. 모두들 가이드가 처음 보기보다는 잘해 줬다는 평이다. 그런데 성도행 비행기가 1시간 이상 연발한다는 안내다. 좀 있다가는 도시락까지 나눠준다고 했다.

   1시간 여 비행해서 성도에 도착했다. 첫날 나왔던 가이드를 다시 만났다. 늦었지만 바로 근처 한식당에서 김치, 된장찌개를 며칠 만에 먹어본다. 대대로 타고난 맛의 유전자는 못 속이는 것 같다. 호텔은 첫날 묵었던 그 곳 ‘준황홀리데이인’이다.

   이번 여행은 고산증, 늦게 도착하는 빡빡한 일정 때문에 동행친구와 같이 오붓이 술 한 잔 나눌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저녁에는 동행친구 내외와 같이 대화의 장을 일부러 마련했다. 좀 내밀한 서로의 가정사까지 나누면서 회포를 풀어 본다. 그러다보니 새벽 3시가 거의 다되어 버렸다. 이러다 밤을 새울 것 같아서 헤어졌다. 이번 여행의 의의를 살리는 멋진 시간이었다. 바쁜 여행 일정에도 이렇듯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욱 절실하다. [2014. 1. 24. 금. 맑음]                       2021.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