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와트와 하롱베이 여행기 4, ‘하롱베이(Halong Bay)’/가늘고 굵은 것이 마치 여명의 실루엣이나 달밤의 창에 비치는 그림자 같은 운치가 있다
청솔고개2021. 2. 2. 23:53
앙코르와트와 하롱베이 여행기 4, ‘하롱베이(Halong Bay)’
청솔고개
하롱베이(Halong Bay)의 아침이 밝아온다. 기대가 크다. 오랜만에 체중을 쟀더니 64kg다. 설사가 계속된다. 지금 내게는 한 모금의 매실 액이 아쉽다. 미지근히 타서 한 두 모금만 하면 깨끗이 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엊저녁에 가이드가 사서 나눠 준 베트남 전통 모자를 쓰고 내린다. 나무껍질로 만든 것 같은 이 모자는 세모꼴인데 내 어릴 적, 지난날 월남 주민들이 어깨에 물장군 같은 걸 메고 일을 할 때 익히 보았던 것이다. 직접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월남전 보도 사진에 곁들인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가 이 모자를 쓰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든다. 항구의 선착장에서 하롱베이 가는 배를 기다린다. 이 바다를 보고 친구 중 누군가가 이를 두고 꼭 고향 지역의 앞바다 같다고 했다. 좀 기다렸다가 더 좋은 배로 갈아타고 출발한다. 이걸 처음에는 고마워하다가도 역시 가이드의 꼼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가이드가 또 옵션 타령이다. 뱃전에서의 식사와 술상 차림 제안이다. 하는 수 없다. 수용하는 것이 대세 아닌가. 이 좋고 흥겨운 분위기를 흩트릴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천천히 미끄러지듯 떠가는 배는 해무가 자욱한 드넓은 호수 같은 물결을 가로지른다. 얼마나 갔을까. 바다 위의 간이 선착장에 내려서 더 작은 보트로 옮겨 탔다. 이 과정에서 아내가 옮겨 타는 배의 나무 갑판을 급히 뛰어내려 딛다가 그냥 발목이 갑판 사이로 빠져버려서 크게 놀랐다. 그 부분이 썩어 있었던 것 같다. 약간 긁히는 정도로 그친 게 천행이었다. 신발도 가이드가 준비한 다른 걸로 갈아 신었다. 타국 먼 곳까지 와서 더 큰 부상을 입었더라면 어떡할 뻔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사 안전에 대한 인식이 미흡한 것 같다.
작은 배로 옮겨 탄 건 바깥에서 볼 수 없는 비경 탐사가 그 목적이란다. 탑승객 전원이 오렌지색 구명조끼를 입었다. 한 순간에 모두들 같은 팀을 응원하는 관중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보트는 날렵하게 넘어질 듯 마구 달리듯 내뺀다.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동굴 속을 지난다. 머리가 동굴천정에 아슬아슬 부딪칠 것만 같다. 그 곳을 빠져나오니 아늑한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는데, 이 동굴을 경계로 인간계와 선계가 구분되는 것 같다. 바로 옆 섬의 산기슭에는 야생 원숭이들이 곧 올 테니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준비하라고 가이드가 안내한다. 먹을거리는 역시 주로 바나나다. 과연 야생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 처음에는 몇 마리 안 돼 보였는데 섬 절벽 바위틈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놈, 굵고 가는 넝쿨에 상체를 거꾸로 하고 매달려 있는 놈, 숲속에 숨어서 고개만 내 밀고 있는 놈 등. 이 녀석은 곧 바다에 곤두박질 할 것 같다. 엄청나다. 모두들 원숭이 떼를 향해서 바나나를 던지는데 도달하지 못하는 게 태반이다. 한 친구가 실력 발휘한다면서 힘껏 던지는데 성공률이 높다. 왕년에 멀리 던지기 선수였다나.
작은 섬에 정박하고 내린다. 다오티탑이라고 표지판이 걸려 있다. 하롱베이 섬에서 유일하게 백사장이 있는 곳이란다. 비치발리용 네트도 설치되어 있다. 계단을 따라 약간 높은 곳으로 한 친구와 같이 올라가보았다. 역시 풍광은 높은 곳에서 보아야한다. 멀리 훤하고 시원한 조망이 멀리 펼쳐진다. 밑에서는 우리보고 빨리 내려오라고 소리친다.
다시 배에 올랐다. 선상에서 식사가 차려져 있다. 생선회, 게, 새우, 그 외 만두 같은 것 등 푸짐하고 먹음직스럽다. 술도 있다. 최고의 호사다. 그런데 설사로 속을 달래가면서 먹으려니 불안하기도 하고 찜찜하다. 우리 탐이 사전에 준비한 소주로 건배도 하니 더욱 취흥(醉興)이 도도해진다. 취흥(醉興)이 곧 여흥(旅興)이다. 이어서 노래방이 열린다. 개인별, 혹은 부부동반으로 노래자랑을 한다. 어디가나 풍류를 아는 우리 민족성향이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배의 창 너머로는 기기묘묘한 섬들의 자태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하루해가 기울어가면서 물상들은 부드러운 안개에 묻혀 짙고 옅으며, 가늘고 굵은 것이 마치 여명의 실루엣이나 달밤의 창에 비치는 그림자 같은 운치가 있다. 전에 보았던 중국 구이린의 수많은 동그란 봉우리 같은 느낌도 든다.
배는 또 다시 작은 섬에 내린다. 이제는 이 섬을 일주할 차례다. 잘 닦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니 언덕 너머 또 다른 호수가 펼쳐진다. 이곳이 바로 열대의 이름 모를 기화요초와 우림으로 꾸며진 파라다이스다. [2013. 1. 16. 수. 흐림] 2021.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