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과 계화
청솔고개
아카시아 꽃 피기 앞서 시가의 가로수에 밤새 이팝이 소복소복 내려앉아 있다.
오월의 맑은 햇살에 이팝이 정월달에 내린 눈 이불처럼 포근하고 소담스럽다.
봄 햇살 아래 퍼져나는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도시는 갑자기 환해져 오월의 태양에 하얀 폭죽이 터져나가는 것 같다.
오월의 한낮 양광에 퍼져나가는 이팝의 맑은 흰색은 도심을 신비롭게 한다.
목화송이나 소복의 흰색이 연상되는 이팝의 흰색에는 왠지 사람과 만물의 혼령이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파도처럼 퍼져나가 뭉개 뭉개 흰 구름송이로 피어나는 벚꽃의 흰색과는 또 다르다.
이팝의 도시는 아주 신비롭고 이국적인 풍광과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주 영적이며 시적이다.
그래서 그 꽃말이 ‘영원한 사랑’이며 그 학명을 풀이하면 '하얀 눈꽃'이라고.
문득 계수나무의 도시 중국 계림(桂林)에서 보았던 계화(桂花)를 떠올려 본다. “저기 저기 저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서 금도끼로 다듬어서”를 읊조리면서.
아래는 2003년 1월 말, 나의 중국 구이린(계림, 桂林) 여행 기록 중 일부.
(전략)도시는 곳곳에 계수나무가 자생하기 때문에 이름도 구이린(桂林)으로 유래. 계수나무는 빨간 꽃의 단계(丹桂), 노란 꽃의 금계(金桂), 하얀 꽃의 은계(銀桂), 사시사철 피는 사철桂로 그 종류가 나눠지고(중략)
계수나무는 복파산(伏波山) 입구에 보란 듯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나는 신기한 무엇이라도 발견한 듯이, 이게 바로 구이린(桂林)을 상징하는 계수나무로구나, 겨울이니 사철 계수나무이겠거니 하면서 자그마하여 앙증맞은 꽃망울을 들여다보았다. 이 겨울에는 어떤 향(香)으로 ‘나그네의 심회를 달랠거뇨’ 하면서. 그러나 꽃망울은 너무 연약해 보였다. 마치 장족의 소녀들처럼.
(時調) 간밤에 날리던 / 청솔고개
간밤에 날리던 강남계림(江南桂林) 계화(桂花) 향내
이강(璃江) 구십 구곡(九十九曲) 댓바람에 흩어지니
나그네 풍진만릿(風塵萬里)길 가슴을 파고 드네.
꽃댕기 청홍주단(靑紅綢緞) 장족(壯族) 아가씨야!
없이 살아가는 신고(辛苦) 온 몸으로 겪어도
속 품은 만단정화(萬端情話)에 그대 손을 잡고 지고
이 봉(峰) 저 봉(峰) 고운 산아 이태백(李太白)이 놀던 산아
계수(桂樹)나무 박힌 산엔 무산선녀(巫山仙女) 자취 없고
휘영청 공산명월(空山明月)만 절세가인(絶世佳人) 울리누나.
다시 이팝나무.
아주 못 살았던 옛날, 어느 해 보릿고개에 며느리가 시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쌀밥을 짓다가 뜸이 잘 들었는지 보려고 밥알 몇 개를 입안에 넣었다고 한다. 마침 이를 본 시어머니가 제삿밥을 퍼먹었다며 쫓아냈는데 오갈 데 없는 이 며느리는 뒷산에서 목메 죽는다. 이듬해 봄에 며느리 무덤가에 흰 소복을 입은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이 이팝이라는 슬픈 사연을 지니고 있다. 또 하나는, 보릿고개 그 시절, 눈 어두운 어머니에게는 쌀밥을 드리고 가난한 아들인 자신은 이팝을 따서 자신의 밥그릇에 담아 먹는 시늉을 했다는 기막힌 사연도 전해지고 있다. 불현 듯, ‘이밥에 고깃국’ 먹는 게 소원이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아침에 오랜만에 산행하러 이팝나무 거리를 지나치는데 간밤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서 이팝이 쌀밥[이밥] 밥알처럼 길바닥에 하얗게 소복이 내려 앉아 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왠지 슬퍼진다.
해마다 오월이면 '이태백이 놀던 저달 속에 계화'의 흰빛과 꼭 닮은 이팝, 나는 소복 입은 이 꽃의 슬픈 전설을 떠올리면서 그 나무 아래를 오랫동안 걷고 싶다.
2020. 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