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碑銘)
청솔고개
내 잠들어 가없이 떨어지거들랑
찬 가슴에 두 손을 모으게 하여
곤한 눈 겹을 쓸어주오
달빛이 없다하더라도
깜빡이는 별빛 같은 옥색 바다가 뵈는
바람 부는 그 언덕을 비추어 주오
밤새 찬 이슬이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내 백랍(白蠟) 같은 영혼, 그 흰 옷 자락을
촉촉이 적시어도
나는 기어이 비상하여 한 떨기로 스치는
겨울바람이 되리라
혹 낮은 머리 뉘일 데 없어
창공 중에 부유하다가도
어느 가을날 휙 돌아오는 골목길에
흩날리는 한 줌의 티끌이 되더라도
내 한하지 않으리라
[1978년 봄, 강원도 한 진중에서]
문득 나의 청년 시절, 강원도의 군 복무 시절의 나날은 절대고독의 하루하루이었기에, 나도 절대적으로 묘비명 하나는 남겨 놓아야 할 것 같았었다.
그때의 기록을 다시 들여다 본다.
그만큼 그 때도 지금만큼이나 절박한 삶의 순간을 살았었다고 하는 반증이리라.
나는 요즘처럼 삶과 죽음, 일상과 그 일상의 소멸의 대비를, 현실의 순간순간마다 실감하였던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묘비명은 오히려 지금이 더 절실할 것 같다.
한 존재가 마음과 몸의 기운이 서서히 소멸해간다.
아버지의 투병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존재의 이유도, 존재의 존엄도, 그 물리적 소멸 앞에서는 참으로 허허로움을 금할 수 없을 것 같다.
또다시 22년 후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40년도 더 지난 지금 내가 다시 묘비명을 남긴다면?
순간순간 사라져가면서 스쳐가는 생각, 주변에 남길 말, 나의 삶의 의미 대한 함축과 정의의 그 한 마디…….
이 한 마디는 바로 나의 생애를 누덕누덕 기워가면서 마지막 한 땀 한 땀 시치고 누비고 호는 바느질 같은 것이리라.
2020.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