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노래, 나의 편지

먼 산에 아지랑이 2/ 품안에 잠자고 옛 동무는 봄이 온 줄 왜 모르시나요, 때로는 퍼질러 주저앉아서 찔레 꽃송이를 따서 도랑물에 띄우기도 한다. 때로는 참꽃 꽃다발이나 엉겅퀴, 꿀풀 다..

청솔고개 2020. 4. 23. 11:14

먼 산에 아지랑이 2

                                                                                                 청솔고개

  나는 이 노래가사를 흥얼거리며, 혹 이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있었는지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친구가 혹 가물가물 기억이라도 되살리면 내가 더 좋다. 원곡의 국적이 어딘지 몰라도, 사연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을 주체하지 못해 노래 절 수를 자꾸 보태 가을 노래까지 덧붙여 구전되어 오는 이 노래는 들을수록 더욱 애잔하고 절실하다. 나는 이 노랫말과 곡조에 취해 다시 어린 시절에 젖어 본다.

 

먼 산에 아지랑이 품안에 잠자고/ 뒷동산에 흐르는 물 또 다시 흐른다.

앞산에는 꽃이 피고 벌 나비는 꽃을 찾는데/ 옛 동무는 봄이 온 줄 왜 모르시나요.

 

먼 산에 아지랑이 품안에 잠자고/ 산골짜기 흐르던 물 또 다시 흐른다.

고목에도 잎이 피고 옛 나비가 꽃을 찾는데/ 가신님은 봄이 온 줄 왜 모르시나요.

 

먼 산에 아지랑이 품안에 잠들고/ 산골짝에 흐르는 물 또다시 흐른다.

고목에도 꽃은 피고 범나비도 춤을 추는데/ 가신님은 어이해서 왜 못 오시나요.

 

풀벌레 울음소리 별빛에 잠들고/ 뒷동산의 들국화는 또다시 피겠지.

거리에도 잎이 피고, 기러기도 벗을 찾는데/ 한번 가신 우리 님은 왜 아니 오시나.

(내 동무는 봄이 오면 또 다시 오겠지)

그래, 우리 마을 열네 명의 열 살 전후 배기의 악동(惡童)들은 떼 지어 오가면서 깜장 고무신을 벗어들고 자갈길을 달리기도 한다. 논에 여학생들을 떠밀어 넣어 울려먹기 장난도 치고, 때로는 퍼질러 주저앉아서 찔레 꽃송이를 따서 도랑물에 띄우기도 한다. 때로는 참꽃 꽃다발이나 엉겅퀴, 꿀풀 다발을 들고 안고 뛰기도 한다.

우리의 학교 길은 이렇게 철따라 길 따라 우리만의 자유로운 활동무대였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우리들은 이 노래 가사에서 나오는 새들이고 냇물이었다.

그렇게 정다운 길가 동산 기슭 흉가처럼 서 있었던 상엿집은 어디 가버렸는고! 보이지 않는다. 저런 귀신 나올 폐가 같은 집에서 어찌 꽃이 장식된 그리 아름다운 상여가 꾸려지는지 내겐 충격이었다. 어린 날의 그러한 아름다움이 오히려 나를 섬뜩하게 했었다. 이런 식의 충격은 성장과정에서 항상 나에게 하나의 강박관념을 형성하곤 했었다. 구름이 낮게 드리워지고 추적추적 장맛비라도 내리는 여름날 아침이면 성내에서 긴 여음(餘音)으로 들리던 기차의 경적소리가 들린다. 그때까지 기차는 책에서나 보았는데 아직 보지 못했던 기적 소리의 여운은 내게 어디라도 이 세상 밖 멀리 나가보라는 짜릿한 유혹이었다. 10살 이전까지는 나는 성내(城內)로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했던 촌뜨기 소년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아득한 이국(異國)에 대한 동경(憧憬)이 어린 소년의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 최초의 이국(異國) 취향(趣向)이랄까.

가을 운동회 날 만국기는 펄럭인다. 확성기는 흥겨운 행진곡을 쏟아낸다. 흰 런닝 셔츠에다 검은 물들인 운동팬티, 깜장고무신의 촌아이들은 익어 가는 벼알처럼 기름진 가을 햇볕으로 짧은 하루해를 아쉬워하면서 마을 축제(祝祭)는 더욱 흥겨워가지. 우리는 모두 어깨동무를 하며 머언사안에지인달래꽃품안에 자암들고…… 고목에도 꼬오치피고…… 강물은또다시흐르은다응원가를 구성지게 읊조린다. 이제 그 노랫말마저 기억에 흐릿하게 희미하게 되어버렸으니…….

코스모스 꽃이 열리어 가고 숨뫼산 밤알은 입을 쩌억 벌리고 가을의 풍요(豊饒)를 구가(謳歌)하면 근처 논에는 활대를 흔들면서 "후여!, 후여!"하는 새 훝는 소리가 하루를 접는다.

40년 전후의 일들에 얽힌 상념(想念)들이 휘익 불어오는 들바람처럼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든다. 상념의 조각들은 하나의 모자이크가 되어 추억의 그림을 그리는데 아직 미완성(未完成)된 모자이크에 윤곽을 그려 넣어야 마무리해야 할 터인데……. 오늘의 이 모임은 바로 이러한 그림 그려 넣기 대회랄까. 내가 학교 울타리 너머 논둑길을 걸으면서 돌 하나에, 풀 한 포기에 추억을 떠올리려 애쓰는 사이에 동기생들이 제법 몇 명 모여서 자리를 깐다. [위의 글은 나의 유·소년기(幼少年期)를 회고한 것이며, 2002년 5월 말에 쓴 것임.]  2020.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