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瑞雪)
청솔고개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는
내 20대의 마지막 계절에
진한 눈물처럼
눈이 내린다
야윈 발목으로 내 온 몸이 짓누르는
숨찬 삶의 무게에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벌판에서
내 20대의 메마른 벌판에서
훠어이 훠어이
쉰 목청 돋구며 홀로 서 있는데
내 20대의 밤은 깊어 가는데
머얼리 산골짝에 빤한 등불에는
탐욕스런 웃음이
얼음장처럼 퍼져나가고
눈 내리는 벌판
오가는 사람하나 없다
끝을 알지 못하는 바람이
눈물 얼어붙은
내 야윈 안면을 할퀴고 가면
길 갈 수도 없는
절망의 매서운 벌판에서
은하처럼 얼어붙은
피곤한 영혼의 그림자
그 남자는
가슴앓이 문학청년
그의 사랑하는 사람 하나
요오꼬가 기억납니다
차창에서 그녀는 그를 떠나보내고 있었지요
정거장 플랫폼에는
마침 서설이 내리고
그들을 이별의 운명으로
기적은 울어 버리고
그렇군요
서설은 그래서 서글프군요
서설이 아니라 애설(哀雪)이지요
그래요
엄머머
눈보라가 치는군요
저것 보세요 소용돌이치는
눈보라를
꼭꼭 저 눈보라에 묻혀 버렸음 좋겠어요
죽음처럼 침묵한
잠을 잤음 좋겠어요
눈이 오면 토끼들은
뭘 먹고 사나요
눈을 먹고 살지요
눈이 오면 비둘기는
뭘 먹고 사나요
눈꽃을 먹고 살지요
어머 개가 짓네요
밤이 깊었군요
그래요 벌써 밤이 깊었군요
잘자요
그래 잘자요
이제는 안녕
[1980. 12. 3]
2020.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