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만난 비
청솔고개
새벽에 일어나 빈 몸으로 밤길을 걸으면
어둠에 함빡 젖어 든 비를 만난다
뼛골 깊이 고이는 서러운 시림에
따사한 체온이 엄마 품처럼 그리운 내 한 몸으로 인해
다만 천만 줄기 가녀린 빗살이
천만 순간의 인연을 얽어 짜고 노래한다
나는 작은 들새도 될 수 없고
더구나 황량한 산야의 한 마리 은빛 나는 노루도 될 수 없어
어느 미몽 새벽에 안개의 늪을 지나
해 뜨는 해변으로 아침노을을 찾아 갔으나
흐릿한 수평선엔 절망의 빗살들이 저주처럼 꽂히고
해변엔 핏빛 파도가 맹수처럼 검은 섬을 삼키고만 있었다
자꾸만 갈라지는 나 홀로 선 모래밭에는
끝없이 떨어지는 아득한 침몰 뿐, 나는 연방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은 일체를 빨아들이고
걷힐 줄 모르는 빗살과 더불어 다가오나니
버려진 방랑자는 검은 숲을 지나 지옥처럼 웅얼대는
절망의 영원한 늪을 끼고 녹 쓴 철길 두 줄기 질벅이는 평행선을 더듬었다
한 사람과 또 한 사람 체온의 뜨거운 열기로
이제 어둠의 그 세계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칠흑처럼 검은 빗물이 한 사람의 긴 머리를 축축이 적셔도
숨찬 멧새에서 연방 뿜어대는 단내 나는 욕망의 입김에
너는 끝내 홀린 듯 눈을 감아버리는가
말라붙은 입술에 균열처럼 터지는 거치른 만남
우리는 언제나 끝없는 지평을 달리는 평행선상에서
너는 다만 환영처럼 나타난 밤의 길벗인가
새벽에 일어나 빈 몸으로 밤길을 헤매면
언제나 어둠에 함빡 젖어 든 비를 만난다
그리고 절망의 눈물에 젖어
썩어지는 잎들을 밟는다
천만 줄기의 가녀린 빗살이
천만 순간의 인연을 얽어 짜고 오열한다
[정사년 초추 진중에서 (동인지 <띠집 12호>게재된 1977. 12.12.)]
2020. 1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