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밭

진정한 소유 4/오래된 통에는 베틀 ⁰바디와 ¹대꼬바리 등 옛 물건이 꽂혀 있다.~ “완전한 정리는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소유는 버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청솔고개 2021. 3. 20. 00:16

진정한 소유 4

                                           청솔고개

 

   

   피아노가 놓여 있는 남쪽 방은 아버지의 힐링장소이다. 25년 전 퇴직 직후, 아버지는 한때 2년 동안인가 통도사 부설 불교 대학에 입학하셔서 법사 공부를 열정적으로 하셨다. 수료하실 때는 웬만한 염불 독경은 능숙하게 염송하시는 걸 한 번씩 들은 적이 있다.  그 때 수료식 때 법사복장을 하고 찍은 사진이 대형 액자 속에 담겨져 이 방의 벽에 걸려 있고 법사 복장도 바로 옆에 잘 걸려 있다. 그 옆에는 해마다 추념식 때 받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새겨진 ‘현충일, 추모’의 리본도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고이 모아서 걸어 놓으셨다. 아버지의 평생 염원을 헤아릴 수가 있겠다.

   건너 방으로 옮겨서 우선 손쉽게 정리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해 넘긴 달력 뒷면에 내가 좋아하는 ‘사랑’ 이란 제목의 노래 가사가 붓으로 빼곡히 씌어 있다. 아버지도 이 노래, 특히 그 가사를 참 좋아하신 것 같다. ‘~하루하루 당신을 볼 때마다 난 다시 태어나죠. 천만 번 하고 싶은 말 듣고 있나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이 노래에서는 이 부분이 늘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어머니께 간절히 하고 싶은 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오랫동안 입원하고 계셨던 어머니는 가족은 물론이고 맏아들도 제대로 못 알아보셨다.  그 당시 나는 병상의 어머니 곁을 지켜드리면서 잠시라도 알아 들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머니가 잠시라도 깨어나시어 이 아들을 알아보신다면 안아 일으켜 귓가에다가 “어머니 사랑합니다.”하고 말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한 마디만이라도 어머니께서 오롯이 알아들을 수 있기를 간구했었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속으로 어머니가 분명히 이 말은 알아 들으실 거라고  확신하고 한번 씩 혼잣말로 이 사랑 고백을 나직이 되뇌어 보았었다.

 

    피아노 위의 오래된 통에는 베틀 ⁰바디와 ¹대꼬바리 등 옛 물건이 꽂혀 있다. 이 장죽꽂이 통은 갈색 칠이 다 벗겨진 나무로 만든 담배통 용도이다. 바디는 적어도 안태고향집에서 우리 어머니의 시어머니, 시할머니 때부턴가 사용한 것이리라. 장죽과 담배 가루를 담는 담배통은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애용하시던 것이다.

   내 유년 시절부터 사랑채 사랑방에는 증조할아버지에서 할아버지 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당신의 친구 분들이 끊임없이 방문하시곤 하셨다. 내가 한 번씩 어르신들에게 인사드리러 가면서 어머니나 할머니의 부탁으로 내 고사리 손으로 주안상도 들고 가곤 했다. 사랑방 안은 어르신들이 내기나 하듯이 뻐끔거리면서 장죽을 빨아대니 방안은 완전히 청회색 담배연기로 자욱하다. 각자 대꼬바리 끝에 발간 불기운이 피어오르고 사랑방 천정에 걸려 있는 갓집은 연초(煙草) 연기에 절어 찌들대로 찌들고 바글거리는 파리 떼가 내까린 똥이 누에씨처럼 눌어붙어서 그 거죽은 누렇게 떠 있다. 바람이 좀 세찬 날에 방문이라도 열면 덜렁거리던 갓집이 꿈에도 한번 씩 나타난다.

   한 생애가 마무리되면 얼마나 많은 것이 묻히고 상실될 것인가. 각자 나름대로 치열하지 않은 생애가 어디 있던가. 이를 생각하니 아득하고 절망적이 된다. 길 가다가도 산길 걷다가도 또 내 절망의 숨결이 입김으로 뿜어질 것 같다. 그 숨결을 한편의 글로 승화시키기 위해 폰으로 기록해 두었다.

   큰집 마당의 동백꽃 몇 송이가 새빨갛게 움을 틔운다. 이걸 보니 어제 산행에서 진달래가 피어 있는 걸 보고 “아이가 아버지는 이걸 기록해야지요.” 해서 내 폰에 담았던 게 생각난다. 이 집이 다시 수리된다면 그 과정과 결과는 어떨까하고 상상해 본다. 고민거리이자 동시에 하나의 기대이기도 하다. 천리 길도 한 걸음이라고 준비해 둔 종이 박스를 2층에 올려서 신문 뭉치부터 담아 보았다. 그러면서 소탐대실(小貪大失)의 교훈이 생각난다. 자칫 잔 것까지 다 움켜쥐려다가 큰 것까지 다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하겠다. 문득 교직 선배 한 사람이 나무에다 인두로 새겨서 내게 준 다음 글귀가 생각난다. “완전한 정리는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진정한 소유는 버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2021. 3. 20.

 

[주(注)]

⁰바디 : 베틀이나 방직기, 가마니틀 따위에 딸린 기구의 하나

¹대꼬바리 : ‘담뱃대’의 토박이 말. 긴담뱃대는 장죽(長竹)이라고도 함.

²내까린 : ‘내깔긴’의 토박이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