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솔고개
지난 연말에 큰집에 들렀다가 아버지의 기록물 하나를 들고 왔다. 아주 두꺼운 대학노트에 아버지가 작정하고 시작한 당신의 회고록 초안(草案)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 생애에서 비교적 극적인 부분을 축약하고 회상해서 쓰다가 다 완성하지는 못한 채 멎어 있었다. 60년대 말, 50여 년 전 현직에 있을 때, 교원의 정기 인사 때 당신의 뜻과는 달리 집에서 아주 먼 북부지방으로 인사 조치된 데 대한 불편한 심중이 소상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기록 중 가장 빠른 날짜가 2019. 11. 6.로 돼 있다.
맨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1930年 11月 17日(檀紀四阡二百六拾參年十日月十七日生) 姓名:○○○ 行列(橿烈), 字(基錫) 父(○○○) 母 父母任으로부터 이 世上에 태어났습니다……"
맨 마지막장은 어깨, 허리 통증과 전립선에 좋다는 운동기구 판매자 콜센터 폰번호가 있다. ‘콜라겐, 연뿌리, 인삼’ 같은 낱말이다. 이로써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홀로 심신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서 얼마나 분투하셨는가 하는 걸 읽을 수 있다. 뒤로 갈수록 아버지의 필체는 어지러워져서 수전증으로 흔들리는 손목을 부여잡고 혼신의 힘을 다해 기록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연(鮮然)하다.
아버지가 요양병원 들어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보내시던 큰방 장롱 서랍에는 이정도 두께의 생애기록물 노트가 줄잡아 10권은 넘어 보인다. 한결같이 반듯한 필체로 아버지의 기록돼 있다. 아버지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나의 이 유별난 기록벽(記錄癖)도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같다. 어쨌든 아버지의 기억은 육신의 소멸로 불과 바람으로 화했을 것이지만 아버지의 이 기록물은 이제 어찌할 거나.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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