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대마도에서의 힐링, 그 둘째 날
청솔고개
오늘 떠날 여장을 꾸리기 전, 아침 식사 전에 가벼운 차림으로 모두들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참으로 상쾌하다. 바로 가까이 맑은 바닷물이 강물처럼 흐른다. 너무 투명해서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인다. 바다 고기떼가 거무스름하게 노니기도 한다. 바닷물이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것은 또 처음 본다. 참 평화스러운 어촌 마을의 아침이다.
할머니 한 분이 오징어를 다듬고 있다. 모두들 둘러서서 큰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바라본다. 그 옆에 빈집이 보이니 k친구가 관심을 가진다. 정말 여기에 살기라도 하려나. 바로 두 군데 빈집이 있다. 1억 원 정도면 안 될까 가격도 매겨본다. 나중에 김상에게 알아보니 적어도 2,3억 원은 호가한다고 한다. 근처를 빙 둘러싸고 있는 납골묘가 또 특이하다. ‘小田家之墓’라고 세로로 쓴 금박 글씨다. 가까이 보니 상당히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모두들의 관심사는 이 납골묘에다 다시 문을 열어서 추가로 후손들의 유골을 안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중에 김상한테 물어 보기로 했다. 등교하는 중고 여학생이 입은 치마가 거의 롱드레스 수준이다. 우리나라 여학생들하고 너무 큰 차이가 난다.
07:30에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가 아주 단출하다. 거의 다이어트식 수준이다. 모두들 낮은 소리로 투덜거린다. 옆 자리 부산 팀들이 준비한 땡초장아찌가 없었다면 거의 굶을 뻔 했다고 난리다. 나는 약간 구미에는 안 맞지만 그럴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08:30에 숙소에서 출발했다. 어제 그냥 차를 타고 지나갔던 만관교(만제키바시)와 만제키세토 운하에 다시 갔다. 차에 내려서 중간쯤 걸어 보았다. 이건 분명한 일본 군국주의의 유물이다. 청일, 노일 전쟁에 승승장구하던 일본 군국 세력은 기고만장해서 이렇게 군사 목적을 위해 이 거대한 운하를 조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풍광은 특이했다.
근처 이즈하라 시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면세점을 잠시 둘러보았다. 오후에 자유 시간이 많다 하니 사는 건 그 때 하기로 하고 몇몇을 눈여겨 봐 놓았다. 휴대용 정수기와 만능칼(맥가이버) 등이 배낭여행 때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터라 구입하기로 했다.
아리아케 등산과 시내 관광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서 김상이 모두들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등산 원하는 팀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난 무엇보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유배지를 둘러보고 싶지만 코스에 없으니 그냥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면암은 대쪽 같은 천생 선비다. 을사늑약 반대 의병을 일으켰지만 진압하러 온 관군이 황명을 받았다 하니 그냥 순순히 붙잡혀서 여기까지 압송되어 결국 굶은 나머지 병으로 순절한 셈이다. 선생은 그 황명의 배후에는 일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그 황명을 거스르는 건 불충이란 논리로 보고 그냥 투항한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는지. 아무튼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처럼 역사적 판단에서 어느 것이 정답일지는 그 당시로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가치의 중심에는 ‘대의(大義)’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당시에도 비록 동시대인에게는 이해 받지 못하더라도 백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자가 결국 선구자, 선각자, 선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백여 년도 더 지난 지금은 그 판단 기준이 정리될 수도 있겠지만 많은 문제가 아직도 그 역사적 사실의 판단과 해석에는 많은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 것이다.
특히 일본과 관련된 친일 청산과 친일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여전히 비극적인 부분이다. 일제 잔재 청산, 혹은 역사정립과 관련된 사항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며 미해결과제다.
언젠가 나 혼자서 여유 있게 돌아보며 이런 문제를 역사의 현장에서 판단해 보고 싶다. 편백(히노키)의 피톤치드 내음 흠뻑 맡으면서 낚시도 여유있게 하고 좀 더 오래 있고 싶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수선사(修善寺)라는 절에 면암(勉庵)선생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修善’이란 현판을 쓴 사람이 친일분자라 하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어서 조선 통신사비와 고려문(高麗門)을 보았다. 옛날 조선과 일본의 역사적 교유 흔적이 이런 한 구조물로 남아 있는 게 오히려 덧없어 보였다.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조금 더 가니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의 결혼 봉축비가 나왔다. 여기에 얽힌 장본인의 비운은 들으면서 한 왕조의 몰락이 가져온 비극에 대한 슬픔과 한이 더 커진다. 정략적 강제 결혼의 결과는 정신 착란증이란 마음의 병을 가져왔다. 늘 실없이 웃는 증상으로 결국 이혼까지 당한 비운의 막내 공주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멀리 아리아케산 정상이 보인다. 높이가 500여 미터라 했으니 혼자 같으면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가라면 못 갈 것 같다. 지금 여기 한낮의 날씨는 폭염 수준이다.
대마도 여행의 대미는 팔번궁(八幡宮)[하치만구] 신사(神社) 방문이다. 사무라이 수호신을 모신 곳이다. 일본은 전쟁에 나갈 때는 고대 전쟁의 신인 팔번신의 깃발을 앞세운다고 한다. 어부도 보호하는 신이라고 한다. 이 신은 백제 15대 근초고왕의 사촌이라는 설도 있다.
일본서기라는 역사서에 우리나라 고대 삼한을 정복했다는 신공왕후의 기록이 나오는데 그 신공왕후와 대마도 번주의 아내 마리아, 그의 아들이 안치된 신사도 보인다. 특이한 것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번주의 아내 마리아가 신으로 모셔져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 만큼 외래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박해가 심한 경우는 없어서 교세를 넓히려고 신도들이 거짓으로 모셨다고도 한다. 그 박해 양상은 펄펄 끓는 온천물에 기독교 신도들을 몸뚱이를 넣었다 뺐다하거나 심지어 사시미(회)치는 박해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일본은 기독교인구가 전 인구의 1%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옆에는 녹나무 몇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천년 넘은 녹나무(야키)는 열 아름도 더 될 것 같아서 팀원들이 끌어안고 사진 포즈를 취해본다. 김상의 말에 따르면 이 녹나무는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고 한다.
이제 계획된 여행 코스 방문은 다 끝났다. 100엔 숍에도 들어가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트에도 자유롭게 들어가서 일본 우동과 생맥주, 쌀 호떡도 사 먹어 보았다. 여행 도중 이런 데서 간식을 자유롭게 사먹으면서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다. 점심은 일본 도시락이었는데 먹을 만했다. 면세점에 가서 아까 보아 두었던 칼과 정수기, 과자 몇 통을 샀다. 비자 현금카드를 사용하여 잔돈을 모두 처분하니 개운하다.
오후 2시 좀 지나서 이즈하라 연안여객터미널이 있는 부두로 출발한다. 부두는 10분 거리도 안 되었다. 같이 간 친구들과 천천히 걸으면서 온갖 이야기도 나누고 유유자적하게 보낸 이번 여행이 참 새롭다. 기다리면서 팀원들이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해서 남은 공금으로 샀다. 130엔짜리 7개 계산하니 910엔이다. 맛이 좋았다. 우리나라도 비싼 건 1,500원에서 몇 천 원짜리 아이스크림도 있으니 이런 것은 여기가 별로 더 비싸지도 않았다.
오후 3시 52분 정확히 대마도 남단 이즈하라항에서 출항, 5시 50분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책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 을 보고 있는데 속이 좀 거북했다. 파도가 제법 세게 일었다.
드디어 부산항, 주변의 고층 건물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 어떻게 답답해서 사나 하는 푸념을 짐작할 만하다. 입항 절차는 싱거울 정도로 간단했다. 고향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0분. 단골 식당에서 늦은 저녁 먹고 간단한 결산 보고 하고 헤어졌다.
[2014. 9. 29.일. 대마도 기행 둘째 날 기록임]
2020. 9.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