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133

산길로/‘하얀 별꽃’이라 이름 붙인 때죽나무 꽃잎이 길바닥에 떨어져서 허옇게 말라 있다

산길로 청솔고개 산길로 접어든다. 초입의 대밭에는 이즈음에 볼거리가 하나 있다. 자고나면 날마다 두 서너 개씩 솟아나는 대순이다.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는 말처럼 처음부터 굵기가 아예 정해져 있다.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대순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떨어져 쌓인 댓잎 낙엽과 죽순 겉껍질 색깔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일단 눈에 띄기만 하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그 왕성한 성장의 기세가 강인한 생명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대순이 돋아 오르는 데에는 좀 비릿한 향이 퍼져 있다. 그런데 오늘 이야깃거리 또 하나. 이 대밭에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고라니 한 마리가 우리가 도착하자 인기척을 느끼고 마치 캥거루처럼 튀어 오르면서 산위로 달아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 산에서 고라니와의 만남은 세 번째다. 뿔이 없는 대신 송..

들길로/야트막한 강물 복판에는 쇠백로가 몇 마리 긴 주둥이를 처박고 있다

들길로 청솔고개 새벽 3시 좀 지나서 잠을 깼다. 5시까지 어제 못한 글쓰기 작업을 마무리했다. 오늘은 준비해서 7시에 산행 출발해야 한다. 6시 쯤 이른 식사를 했다. 이때 벌써 해가 돋아오고 북동쪽 뒤의 창문이 훤하다. 새벽 기운이 솟아난다. 새벽은 언제나 이렇게 누구든지 서둘러야 직접 맞이할 수 있는 멋진 시간이다. 새벽의 불그스름한 기운은 새날을 준비하는 에너지원이다. 참 오랜만에 새벽의 기운을 느낀다. 삶은 계란, 토마토, 브라질너트 등으로 속은 가볍게 채우되 에너지는 충분히 공급하려 한다. 6시 40분 쯤 현관문을 나섰다. 아직도 서늘한 기운이다. 이것도 새벽 기운이다. 아파트 바깥 통로에도 아직도 사람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산행 가는 길에도 새벽 기운으로 충만해 있다. 시장 골목을 나서..

빈 집/어린 새끼 불려가면서 대신 텅 빈 이 집을 지켜 줄 것이다, 대대손손

빈 집 청솔고개 큰집을 오랜만에 찾는다. 삼십 년 전인가 새로 냈다고 하는 대문 고리는 얼마 전 안팎 것 모두 떨어져간 상태 그대로다. 옥외 화장실 문은 탈이 나서 빼내서 치워 놓은 지 거의 1년이나 된다. 빈집의 티가 그래도 드러난다. 쌓인 먼지 냄새가 구석마다 풀풀 나지만 꽃밭에 올려놓은 장독들 틈새로 달개비, 취나물, 쑥이나 이름도 모를 잡초들은 무성하게 크고 있다. 이들은 집안의 먼지도 먹고 자라는 모양이다. 사철나무도 동백도 건강하다. 마당 복판에는 이름도 모르는 ‘결이 아주 질긴 나무’ 밑 둥에서부터는 무성한 잎들이 무성하다. 손바닥만 마당의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 있다. 이 나무는 올봄에 밑동만 남겨 놓고 가지는 다 잘라 놓았는데 벌써 마당을 꽉 채워놓는다. 마당과 벽은 벌써 해거름 그늘이 ..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3/3)/이방인으로서 관찰자 시점으로 나눠가질 만한 추억 조각 하나라도 취하려고 애쓴다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3/3) 청솔고개 어린 시절 추억의 공유(共有)가 서로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들은 다수이고, 나에 대한 공유사항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단 한 사람, 공유사항이 그들보다 훨씬 더 적다. 참 답답하고 난감한 노릇이다. 그들이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마치 모자이크 그림을 완성해가듯이, 세세(細細)한 부분까지 이야기의 맥락(脈絡)을 조합해 갈 때, 나는 그 공간과 시간의 배경 밖에서 존재한다. 스토리 속에 잠깐이라도 등장하는 인물은 못 되고, 일방적으로 이야기 들어주는 외로운 청자(聽者)일 뿐이다 작년에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다. 올해 만나면 좀 좋아진다는 기대는 아예 하지 않았다. 작년 1년 간 서로 함께 한 시간만큼 형성된 인상이나 기..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2/3)/ 서너 발이나 됨직한 느티나무 그늘에서 오랜만에 밀렸던 대화를 나누는 저 동기생들의 이야기를 나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2/3) 청솔고개 아버지의 갑작스런 전근으로 나만 남고 부모님은 근무지로 살림을 옮겨 가셨다. 남겨진 나에게는 그 한두 달 동안 많은 일이 발생했었다. 그건 나로 하여금 새로운 기분을 체험하게 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우리 마을 열넷 악동(惡童)들은 마을이 빤히 내려다보이 언덕배기에 날마다 모여서 그럴 듯한 사업(?)을 구상하고. 또 그것이 주는 황당(荒唐)함과 상상력을 즐기곤 하였었다. 대개 이런 식이었다.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떼로 모여서 마을 점방(店房) 개업 구상도 하고, 때로는 동네 아동 극단(劇團)을 모아서 연기 활동도 흉내 내곤 하였던 것이다. 부모님이 부재중인 우리 집 빈방에 모여서 이불 홑청을 막(幕)으로 삼아서 무대를 꾸몄다. 지..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1/3)/모교의 창창하게 우거진 벚나무, 수양버들 숲 밑에서 나는 이러저러한 회상의 여행을 끊임없이 이어간다

어떤 모임에서 추억(追憶) 공유(共有)하기 (1/3) 청솔고개 지난 5월 26일 찔레꽃 향내도 그윽할 적에 초등학교 동기회 모임이 있었다. 고향 마을에 아직 그대로 자리 잡고 있는 초등학교 교정에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술 한 잔 할 터이니 연락해서 가는 차편에 편승했다. 내가 편승해서 가는 차의 주인인 동기는 나보다 두어 살 많은 친구로 직업군인 출신이다. 그 동안 여러 일을 해본 친구로 자칭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위인이다. 여러 직업 체험이 화려한 만큼 입담도 대단하였다. 국산 최고급승용차 안에는 공모전에서자작 가요곡이 선발되어서 본인이 직접 부르고 녹음한 노래 테이프가 있었다. 인근의 명산을 주제로 한 노래였다. 녹음된 테이프의 노래를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 내가 들어도 제법 잘 부른 것 ..

아카시아 꽃/나에게는 나의 20대 후반 아카시아 꽃보다 더 진하게 풍겼던 순수와 열정, 고뇌의 감성의 향내음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아카시아 꽃 청솔고개 오월은 아카시아 꽃으로 시작한다. 해마다 오월만 되면 선명한 영상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 내 청춘 시절, 군 생활 때, 병영 주변의 울타리로 심어져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더미다. 새벽 두 시, 벌써 서산으로 달은 지려하는데, 보초교대하기 위해 철모를 쓰면 한 떨기 밤바람이 휙 불어든다. 그 때 훅 풍기는 아카시아의 향훈. 미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우는 달빛 아래, 휙휙 불어드는 오월의 밤바람에 아카시아 향내가 진중에서 하늘로 흩어진다. 해마다 오월, 아카시아 꽃더미만 보면, 사십년도 더 전, 내 감성과 열정이 솟구치던 열혈 청년 시절의 그 순간순간이 떠오른다. 아카시아 꽃바람이 휙 불어들 때, 그 밤의 향과 색과 빛은 평생 나에게 천형(天刑) 같이 새겨져 있다. 아이가 ..

사월의 단상/ 꽃이 피는 사월이 손을 흔들며 내 생애에게 작별을 고한다

사월의 단상, "가장 불행하게 여기는 것은, 내가 언젠가는 이른 봄 날 새벽, 연분홍 꽃봉오리가 터 오름을 보고도, 늦은 봄날, 한 떨기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고도, 아무런 가슴 설렘도, 가슴 뜀도, 슬픔도, 애연함도, 어떤 감성도 모두 상실하게 되는, 그러한 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리라." 청솔고개 꽃이 피는 사월이 손을 흔들며 내 생애에게 작별을 고한다, 올봄에도. 아흐레째, 여덟 밤을 병원 보조 침상에서 잤다. 새삼스레 다시 한 번 내 한 몸 누일 터가 반의반 평도 필..

흙과 땅 (2/2)/육질(肉質)은 탈골(脫骨)이 되어 땅에 흘러내려 흙의 성분으로 화하는 모습도 보았다

흙과 땅 (2/2) 청솔고개 나는 거의 매일 한 시간 정도 가까운 공원을 뛰거나 산책을 하면서 땅을 밟는다. 직립보행이란 인간의 원리대로 생활하니 몸은 더욱 가벼워지고 마음은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나는 뛰면서 주로 땅을 쳐다보고 땅과 대화한다. 주말에는 아내와 같이 소금강산 너머 성지골이라는 샘터에 소풍 삼아 물을 길러 간다. 철따라 샘터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봄에는 정겨운 진달래, 화사한 산수유, 여름엔 애틋한 달맞이꽃, 가을은 억새꽃, 겨울은 솔숲과 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천년의 바람이 나를 유혹한다. 특히 봄철, 4월쯤에는 샘터가 있는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길은 거의 환상적이다. 몇 년 전 산불로 키 큰 나무들은 모두 넘어져 있어 마치 태산준령이 고사목(枯死木)을 보는 듯하였다. 일부는 ..

흙과 땅 (1/2)/나는 화단을 일굴 때 가장 먼저 흙 속에 묻혀 있는 종잇조각, 비닐 조각, 스티로폼 부스러기 등을 골라낸다

흙과 땅 (1/2) 청솔고개 “여보!. 이 나뭇잎 좀 빨리 내다 버려요. 너무 지저분해요. 아내의 성화가 빗발친다. 나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그건 우리 집 식구들의 양식인데 왜 내다버려요?” 라일락, 감나무, 살구나무가 꾀 크게 자라서 나뭇잎이 질 때면 아내는 영락없이 이렇게 짜증을 낸다. 그럴 때면 나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원리를 또 설교한다. 땅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영양분을 먹여야 한다. 영양분이란 바로 자기 몸에서 난 잎들이 져서 만들어진다고. 이렇게 18년 동안 우리 집 뜰은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들을 하나도 버리지도 않고 북돋워 주었더니만 족히 한 자는 넘게 복토(覆土)가 되어 흙이 마당 보도블록으로 흘러내릴 지경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 땅에 뿌리박고 사는 우리 나무 식구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